default_setNet1_2

이창모 목사, 박용규 교수의 두 가지 愚問에 答하다

기사승인 2018.05.07  11:48:19

공유
default_news_ad1
   
 박용규 교수(총신대 신학대학원, 교회사)


글을 시작하며

7인의 총신 교수들과 함께 박용규 교수가 주도한 [정이철의 신학사상 문제점 분석과 평가논문]은 그 내용이 충격적일 정도로 뜻밖이어서 필자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논문을 작성한 교수들이 개혁주의의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는 총신 신대원의 교수들일진대 특히 방언기도 문제에 관해서는 마치 오순절주의 신학교 교수들이 쓴 글을 읽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박용규 교수가 작성한 [사랑하는 정이철 목사님께]에서는 정작 정이철 목사가 자신을 비판한 신학적인 문제의 본질은 외면한 채, ‘내가 언제 어느 사이트에 연락해서 동영상을 내리라고 했느냐, 내가 언제 신천지, 안상홍, 박윤식 등만 이단이라고 했느냐’는 둥의 비본질적인 질문을 내세워 본질을 회피하려는 박용규 교수의 비열한 모습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아서 필자의 마음이 심히 착잡했다.

더구나 박 교수의 이런 모습은 마치 거짓교사들이 자신들의 정체와 거짓 복음을 신랄하게 지적한 바울의 비판에 직접 대응하지 아니하고, 피상적이라 할 수 있는 바울의 사도적 자격을 운운함으로써, 바울의 신뢰성을 떨어뜨려 바울이 전한 참 복음과 자신들에 대한 바울의 비판을 무용지물로 만들려고 했던 비열한 행태와 유사했기 때문에 필자의 마음은 더욱 심히 착잡했다.

박용규 교수는 이런 비본질적인 질문 대신에, 정이철 목사가 비판한 자신의 신학적인 문제에 정면으로 대응하며 변명했어야 했다. 정이철 목사가 박용규 교수의 신학 사상을 문제 삼은 이유는 박용규 교수가 자신의 저서와 강의에서 찰스 피니의 부흥사상, 웨일즈 부흥(1904년), 아주사 부흥(1906년) 등을 성령이 역사하신 부흥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했기 때문이다.

물론 교파마다 추구하는 신학 사상에 따라 찰스 피니의 부흥사상 등에 대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여러 견해들을 피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박용규 교수는 찰스 피니의 부흥사상, 웨일즈 부흥, 아주사 부흥 등을 긍정적으로 평가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이 정이철 목사의 생각이다. 왜냐하면 박용규 교수는 개혁주의 신학의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는 장로교 합동 교단에 소속된 총신신대원의 교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박 교수가 찰스 피니의 부흥사상, 웨일즈 부흥, 아주사 부흥 등을 성령이 역사하신 부흥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장로교 합동 교단이 지향하는 개혁주의 신학의 근간을 흔드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정이철 목사는 개혁주의 신학을 계승해야 할 총신의 장래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개혁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박용규 교수의 신학 사상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박 교수는 본질이 아닌, 피상적인 질문 따위로 정이철 목사에게 시비를 걸어 본질을 모호하게 만들려는 시도를 그만두고, 이제라도 정 목사의 비판에 대해 자신의 책이나 강의가 개혁주의 신학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을 변호하며, 정당하게 대응해야 한다. 만약 박 교수가 정 목사의 비판에 대해 개혁주의 입장에서 신학적인 반론을 제대로 할 수 없다면, 사변적인 질문으로 정 목사를 괴롭힐 것이 아니라, 개혁주의 산실인 총신을 떠나, 오순절주의 신학교나 신사도주의 학교에 가는 것이 자신을 위하는 길일 것이다. 왜냐하면 오순절주의 신학교나 신사도주의 학교에서는 찰스 피니의 부흥사상, 웨일즈 부흥, 아주사 부흥 등을 성령의 역사라고 핏대를 올려 가르쳐도 아무도 그를 비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박용규 교수가 주도한 소논문과 정이철 목사에게 제시한 두 가지 질문 글을 통해, 지면 관계상 다는 살필 수 없지만, 간단하게나마 박 교수의 수준 이하의 민낯을 살펴보자.
 

박용규 교수가 주도해 쓴 [정이철의 신학사상 문제점 분석과 평가논문]에 대하여

박용규 교수가 중심이 된 7인의 총신 교수들은, [정이철의 신학사상 문제점 분석과 평가논문]에서 정이철 목사의 신학사상에 이단성이 있다고 규정했다. 이들이(앞으로 박용규 교수로 통일) ‘정이철 목사의 신학 사상에 이단성이 있다’라고 규정하는 데 동원한 근거들 중 하나는 정이철 목사가 박영돈 교수의 방언관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한 글이었다.

그러나 박용규 교수의 주장은 한 마디로 적반하장 그 자체였다. 왜냐하면 개혁주의 교단의 신학자이면서도 개혁주의에서 벗어난 시각으로 방언기도를 피력하는 박영돈 교수를 향해, 철저하게 개혁주의 입장에서 비판하고 있는 정이철 목사를 오히려 이단성이 있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박용규 교수는 ‘세 사람이 모이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 낸다’는 우리 속담을 굳게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방언기도에 대한 합동 교단의 전통적인 신학적 견해는 방언기도를 성령의 은사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필자의 부모 세대에서는 방언기도를 하는 자들은 자신의 담임목사님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몰래몰래 기도원 등에서 은밀하게 방언기도를 했으며, 교회에서는 방언기도를 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나 작금에 와서 합동 교단 안에서마저 방언기도가 무분별하게 성행하고 있는 것은 오순절주의의 득세(그들은 이것을 ‘부흥’이라고 부른다)에 밀려서, 또 오순절주의의 교회들처럼 성장(필자는 이것을 ‘비만’이라고 부른다)하고 싶은 간절함에 교단이나 교회에서 서로들 적당하게 모른 척 해왔으며, 이제는 대형교회들을 중심으로 노골적으로 방언기도를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움직일 수 없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합동 교단이 그동안 방언기도에 대한 전통적인 개혁주의 입장(방언기도는 성령의 은사가 아니다)을 한 번도 공식적으로 수정하거나 포기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박영돈 교수가 속해 있는 고신 교단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박영돈 교수의 방언관은 개혁주의 입장에서의 방언관이 결코 아니다. 그런데도 개혁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총신신대원 교수들이 개혁주의에서 벗어난 박영돈 교수의 방언관을 옹호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며, 또 적반하장으로 개혁주의 입장에서 박영돈 교수의 방언관을 비판하는 정이철 목사를 이단으로 규정하는 짓은 반드시 회개해야 할 범죄 행위이다.

다시 말하지만, 현재 장로교단을 비롯한 한국교회의 전반에 방언기도가 만연되어 있고, 그래서 방언기도를 지지하는 자가 절대 다수라 할지라도, 또 개혁주의 교단의 신학자들 다수가 방언기도를 인정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개혁주의 신학은 결단코 아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입장에서 그들의 방언관을 비판한 정 목사 또한 결코 이단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방언기도의 선악 유무를 판단하는 최종 권위는 절대 다수가 방언기도를 인정한다거나, 방언기도를 인정하는 어떤 유명한 교수의 견해가 아니라 유일한 하나님의 특별 계시인 성경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성경(바울이)이 방언기도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정이철 목사는 방언이 언급된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 철저하게 의거해서 이 시대의 방언기도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비판해 왔다. 그럼에도 박용규 교수가 박영돈 교수의 유명세를 등에 업고, 박영돈 교수의 방언관을 비판했기 때문에 당연히 틀렸다는 논리로, 오히려 정이철 목사를 이단으로 규정하려고 한 시도는, 아마도 박용규 교수가 고전12-14장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고린도교회의 방언에 대해 아무것도 제대로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는 앞으로 철저하게 개혁주의적인 입장에서, 또 방언에 관한 성경 본문의 바른 해석을 근거로, [정이철의 신학사상 문제점 분석과 평가논문]에서 박용규 교수가 옹호한 박영돈 교수의 방언관을 심도 있게 비판할 것이며, 이 비판을 통해서 박용규 교수와 6인의 총신신대원 교수들의 신학적인 자질의 심각성을 경고할 예정이다. 따라서 필자의 비판에 대해 7인의 교수들은, 특히 박용규 교수는 유명한 인간들의 방언관을 동원하는 대신에, 개혁주의 입장에서 철저하게 성경에 근거한 바른 답변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박용규 교수의 총신신대원 교수답지 못한 무지를 하나 더 살펴보자(이런 무지는 논문 도처에 널려 있어서 다 지적하려면 책 한 권의 분량으로도 모자랄 지경이다).

"박영돈 교수는 방언에 대해 나름대로 개혁주의 틀 안에서 건전하고 날카로운 해석과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 가운데는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전서의 방언을 모두 외국어라고 가르치는 자들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개혁주의 학자들 가운데는 사도행전의 방언은 외국어이었지만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외국어가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일종의 기도 방식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많다. 박영돈 교수는 이러한 개혁신학 입장에서 신학적 지식과 해석학적 지식을 갖고 나름대로의 견해를 밝힌 것이다."(정이철의 신학사상 문제점 분석과 평가, p.2)

박영돈 교수가 나름대로 개혁주의 틀 안에서 자신의 신학적 견해를 밝히고 있다는 박용규 교수의 평가는 인정할 수 있다(그것도 겨우....), 그러나 적어도 방언에 관한 한(다른 곳에서도 종종 이런 성격의 경향들 발견할 수 있지만 위험한 수준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박영돈 교수는 개혁주의에서 한참 벗어난 위험한 방언관을 소유하고 있음을 놓치면 안 된다.

또 개혁주의 학자들 가운데서도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외국어가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일종의 기도 방식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많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게 주장하는 교수들이 많다고 해서 그것이 곧 방언에 대한 개혁주의적인 시각일 수는 없다. 단지 그것은 개혁주의 신학자들 중에 방언에 대해서 개혁주의를 벗어난 주장을 하고 있는 자들이 많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아마 이런 자들은 절대 다수의 오순절주의의 세력에 편승하여, 안전한 길을 택한 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들은 개혁주의 진영을 떠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왜냐하면 개혁주의 신학의 터전을 정초한 신학자들 중에 방언기도를 성령의 은사로 인정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바울이 방언기도를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성경에서 확인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박용규 교수의 한심한 무지를 하나 더 살펴보자.

"박영돈 교수가 이단이 아니라는 것을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데 왜 유독 정이철 목사만 박영돈 교수를 향해 이단 이론을 답습하고 동승하고 있다고 주장할까? 그것은 다른 이유가 없다. 정이철 목사 자신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단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정이철의 신학사상 문제점 분석과 평가, p.2)

박용규 교수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박영돈 교수가 이단이 아니라고 규정한다(그렇다고 해서 박영돈 교수가 이단이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방언관에 있어서는 정이철 목사가 비판하듯이, 박영돈 교수가 이단성이 있는 아류들과 동일 선상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얼마나 한심한 노릇인가? 예수님의 공생애 끝에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있었는가? 이스라엘의 절대다수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마땅한 자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유대 당국자들은 겉으로는 정치범의 명분이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모독한 이단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던 것이다. 지금 박용규 교수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 당국자들과 똑같은 논리로 정이철 목사를 이단으로 몰아 죽이려고 하고 있다.

아래 글에서는 박용규 교수의 더욱 한심한 무지를 살필 수 있다. 이것은 어쩌면 총신신대원 교수로서의 심각한 결격 사유에 해당될 지도 모르겠다.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한 것도 아닌데 박 교수를 이단으로 모는 정이철 목사는 성경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알고 있기나 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정이철의 신학사상 문제점 분석과 평가, p.2, 각주1)

   
 정이철 목사, <바른믿음> 대표

여기서 다시 한 번 빅용규 교수의 어처구니없는 무지가 여지없이 드러난다.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한 것”은 초대교회 당시의 대표적인 이단이었던 영지주의 계열의 신앙이었다. 물론 지금도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면 이단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단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박용규 교수의 논리는 어처구니가 없는 성경적 무뇌(無腦)의 논리가 아닐 수 없다.

생각해 보라. 요즘 이단들 중에, 예를 들면 이만희 같은 이단들이 성육신을 부인하는가?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박용규 교수의 논리대로라면 성육신을 부인하지 않는 이만희는 이단이 아니며, 오히려 이만희를 이단이라고 비판하는 자가 이단이 되고 만다. 만약 박용규 교수가 이만희를 이단으로 규정한 적이 있다면, 그때 박 교수는 스스로 자신을 이단으로 규정한 셈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수준으로 무장된 박용규 교수를 비롯한 7인의 교수들이 개혁주의 신학의 산실인 총신신대원의 교수 자리를 보존하고 있다는 것은 합동 교단과 총신신대원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합동 교단과 총신신대원을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정이철 목사가 이들을 향해 마치 미친개처럼 짖어대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며, 이런 미친개처럼 짖어대는 목사가 합동 교단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합동 교단과 총신을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일 것이다.
 

정이철 목사에게 질문한 박용규 교수의 두 가지 우문(愚問)에 대하여

앞에서 언급했지만, 본질을 비켜가려는 어리석은 질문에 답하는 것은, 똑같이 어리석은 일일 수 있어서 주저되지만, 그래도 우문에 대한 필자의 대답이 혹시라도 박용규 교수에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할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다는 마음에, 필자는 박용규 교수의 두 가지 우문에 답하기로 결심했다.
 

1. 박용규 교수의 첫 번째 우문에 대하여

박 교수는 정 목사에게 첫 번째 답변 요구를 다음과 같이 했다.

“과연 제가 정이철 목사님의 비판이 두려워, 어느 사이트에 연락을 취해 어떤 영상을 내리라고 했다는 말인지 밝혀주기 바랍니다. 정 목사님께서 주장하기를 ‘제가 정 목사님의 저에 대한 비판의 글을 보고서 겁이 나서 관련 영상을 게재한 사이트에 연락하여 영상을 내리라고 해서 내렸다’고 주장하였습니다.”(박용규, “사랑하는 정이철 목사님께”, p.1)

다음은 박용규 교수가 정이철 목사에게 질문하면서 문제 삼은 정 목사의 실제 글이다. 밑줄 친 부분에 유의해서 박용규 교수의 질문과 비교해 보라.

“나중에 보니 그 글의 근거가 되는 강의 영상이 인터넷에서 사라졌다. 박용규 교수 본인이 손을 써서 없앤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신학에 대한 시비가 일어나면 정직하게 사과하고 해명하던지, 아니면 반박하던지 해야 할 것이다. 명망 있는 교수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내 컴퓨터에 이미 그 강의 영상이 다운되어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런 경우를 대비하여 미리 준비하신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이 글을 쓸 수 있었다.”(박용규, “사랑하는 정이철 목사님께”, p.1)

정이철 목사는 우연히 박용규 교수의 어느 인터넷 강의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아 그 강의를 근거로 박 교수의 신학 사상을 비판했다. 그리고 다시 그 영상을 보려고 그 사이트를 방문했을 때, 공교롭게도 그 강의 영상은 내려지고 없었다. 정 목사는 이런 인과관계를 근거로, “박용규 교수 본인이 손을 써서 없앤 것으로 보인다.”라는 추측으로 박 교수의 태도를 비판했다.

물론 ‘팩트’가 확인되지 않은 ‘추측’을 근거로 어떤 사상이나 사람을 비판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일 수 있다. 왜냐하면 추측이 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정 목사가 자신의 추측을 근거로 박용규 교수의 태도를 비판한 것은 실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 실수는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그리고 비교적 중하지 않은 실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박용규 교수도 자신의 추측을 근거로 정 목사에게 비아냥거림에 가까운 질문을 하고 있기 않는가! 아래를 보라.

"한 가지 더 짚고 싶은 점이 있는데, 조금 전 어떤 분이 정 목사님이 운영하는 <바른믿음> 사이트의 분류 항목 명이 수정된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문제인물’이란 항이 ‘깊은토론’이란 항목 명으로 바뀌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정 목사님은 왜 이렇게 수정했는지도 말씀해주셔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문제인물’이라는 항목 안에 유명인사들을 나열하여 강하게 성토하다가 왜 은근히 분류 항목을 수정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문제인물’과 ‘깊은토론’은 전혀 의미도 주는 이미지도 다릅니다.

혹시 총회 실행위원회와 이단대책위원회에서 논의가 되고 있다는 점이 부담이 가셨나요? 정 목사님께서 이들 인물들을 문제의 인물이 아니라 깊은 토론이 필요하다는 입장 수정을 하셨다는 의미인가요? 며칠 사이에 그런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도 놀랄 일입니다. 왜 수정했는지 그 이유도 궁금합니다. 얼마 전에 정 목사님께서 감리교 웨슬리의 구원관을 행위구원이라고 주장하였다가 사과한 것을 보았는데 이번에도 그럴 것은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박용규, “사랑하는 정이철 목사님께”, p.5)

정이철 목사가 <바른믿음> 사이트의 큰 제목을 바꾼 것은, 공교롭게도 시기적으로 겹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박 교수가 추측한 것처럼 이단대책위원회의 논의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른믿음>을 사랑하는 애독자들의 권유 때문이었다. <바른믿음> 애독자들 중 몇몇 분들이 <바른믿음>의 큰 제목에 너무 전투적인 냄새가 나서 그동안 부담스러웠다고 하면서, ‘문제 인물’과 같은 제목은 ‘심층 연구’ 또는 ‘깊은 토론’과 같은 것으로 바꾸었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 정이철 목사는 이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여 <바른믿음>의 큰 제목을 전투적인 냄새가 나지 않는 제목으로 바꾼 것이다.

정이철 목사가 이대위의 논의를 정말로 두려워하거나 부담스러워 했다면, 큰 제목을 바꾸는 대신에 큰 제목 속에 있는 문제의 글들을 내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문제의 글들을 그대로 둔 채 큰 제목만 바꾸는 것은 눈감고 야옹하는 것처럼 실제로는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박용규 교수가 이런 추측을 하는 것은, 정이철 목사의 지적 수준을 마치 호랑이를 만난 하룻강아지가 호랑이가 너무 무섭고 부담이 되어서 자신의 머리만 짚더미에 깊이 박아 넣고서는 안전하게 숨었다고 여기는 하룻강아지의 지적 수준 정도로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런 속담을 인용해서 박 교수의 지적 수준을 가늠하는 것이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미친 개 눈에는 몽둥이만 보인다’는 속담보다는 훨씬 점잖을 것 같아서, “부처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속담으로 박 교수의 지적 수준 평가를 대신하겠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아주 중요한 것이 있다. 앞에서 필자는 정 목사가 ‘팩트’가 없어서 ‘단정’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정황 증거만을 가지고 “박 교수가 ~ 그런 것 같다”라고 추측 한 것은 실수라고 말했지만, 그러나 ‘추측’이 언제나 ‘실수’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추측’이 꼭 필요한 경우도 적지 않게 있다는 사실이다. 수사관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이들에게는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다”는 상황이 심심찮게 일어난다, 이런 상황에서 수사과들이 ‘팩트’가 없다고 해서 수사를 멈추지는 않는다. 비록 심증만 있어서 수사에 무리가 따른다 할지라도 그것을 근거로 한 ‘추측’으로 수사에 임하는 것이 수사관들의 의무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수호하며, 그 진리에서 떠난 자들을 비판하는 자들에게도 수사관들의 경우가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정이철 목사는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어서, 그러나 수사관의 심정으로 어쩔 수 없이 ‘추측’으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정 목사에게 ‘내가 언제 어떤 사이트에 연락해서 글을 내리라고 했느냐?’는 박용규 교수의 물증 요구의 질문은 코미디에 가까운 우문이 아닐 수 없다(물론 ‘추측’이 틀려서 ‘실수’로 나타난다면, ‘추측’ 당사자는 피해자에게 자신의 ‘실수’를 정중하게 사과해야 한다. 아마 정이철 목사도 ‘추측’이 틀려서 그것이 ‘실수’로 귀결된다면, 틀림없이 피해자에게 머리 숙여 정중히 사과할 것이다. 왜냐하면 정이철 목사는 이전에도 그래 왔기 때문이다).

아무튼 정 목사는 ‘팩트’가 없어서 ‘단정’해서 말하지 못하고, 정황 증거만을 가지고 “박용규 교수가 ~ 것으로 보인다”라는 ‘추측’을 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치명적인 실수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정 목사는 누가 읽어도 이해할 수 있도록 ‘팩트’가 아닌 ‘추측’임을 명백히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 교수는 정 목사의 “박 교수가 ~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 명백한 “추측”을, ‘제가 정 목사님의 저에 대한 비판의 글을 보고서 겁이 나서 관련 영상을 게재한 사이트에 연락하여 영상을 내리라고 해서 내렸다’라는 명백한 ‘단정’으로 변조시키는 거짓말을 했다. 거기에다 정 목사가 하지도 않은 ‘겁이 나서’라는 말을 마치 정 목사가 한 것처럼 거짓말을 했다. 이런 행태야말로 특히 하나님의 진리를 다루는 자들에게는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금기 사항이다. 따라서 ‘팩트’ 없이 ‘추측’으로 비판한 정이철 목사의 실수보다 명백한 ‘추측’을 ‘단정’으로 바꾸어 버린 박용규 교수의 거짓말이 훨씬 더 심각한 것임을 박 교수는 깨달아야 할 것이다.

또 박용규 교수는 정이철 목사의 ‘요한 웨슬레’에 대한 사과와 수정을 놓고, 자신에 대해서도 결국 그렇게 사과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지나친 희망을 품었다.

다음은 박용규 교수가 비아냥거림에 가까운 질문으로, 왜 사과했는지 해명하라고 요구한 근거인 정이철 목사의 사과 글이다.

"금년은 종교개혁 500주년되는 해입니다. 저는 웨슬리의 구원론이 그리스도의 피 공로외 인간의 회개, 성화가 중요한 요인이 되어 구원의 완성이 이루어진다는 행위구원론이라고 오해한 상태에서, 과연 그러한지를 묻는 공개적이고 도발적인 질문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행위구원사상을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짐작했던 한국 감리교신학대학의 교수님들이 웨슬리의 구원론이 결코 행위구원론적이지 않다는 분명한 신학적 해석과 입장을 밝히는 글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저에게는 충격적이었고 또한 놀랍고도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그 내용을 발견한 즉시 “감신대 임성모 교수님의 글이 웨슬리 신학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라면, 저는 웨슬리를 존경할 수 있습니다”라고 공개적으로 표명했습니다.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한국 감신대 이후정 교수님의 글에서도 제가 알고 있는 웨슬리 신학에 대한 내용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내용을 또 발견했습니다.

그 이후 저는 저의 도발적인 글로 인해 마음이 크게 상하신 모든 분들, 특히 감리교 성도님들과 목회자님들에게 진실하게 사과드리고 더 이상 문제로 불편한 관계의 날을 세우지 않으려고 결정했습니다. 그 분들에게 불편을 야기했던 저의 원래의 글을 내릴까에 대해서도 고려하고 있습니다."(정이철, “이것이 저의 진심의 사과이고 분명한 소신입니다”, 2017.9.26. <바른믿음>에 입력)

얼마나 정직하고 용기 있는 행동인가? 누구처럼 피상적인 질문들을 가지고 시비를 걸어서 자신의 잘못을 감추려는 비겁한 행동에 비해, 자신의 주장에 잘못이 있음을 깨달았을 때, 주저하지 않고 사과의 글을 올린 결단은 칭찬해 주어야 할 ‘정직’이며, ‘용기’이지, 비난받을 만한 일은 결코 아니지 않는가? 오히려 이런 ‘정직’과 ‘용기’를 비아냥거림에 가까운 질문으로 폄하한 자가 비난받아 마땅한, ‘정직하지 않음’과 ‘용기 없음’의 소유자가 아니겠는가? 또 한 번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속담으로, 박용규 교수의 질문 수준의 평가를 대신하겠다.

   
 이창모 목사(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 담임, 예장 합동)


2. 박용규 교수의 두 번째 우문에 대하여

박용규 교수는 정이철 목사에게 두 번째로 아래와 같은 질문을 했다(아래 푸른 글씨는 박용규 교수 자신의 말이며, 붉은 글씨는 정 목사의 말을 박 교수가 인용한 것이다).

"과연 정이철 목사님의 주장처럼 제가 “오직 신천지, 안상홍, 박윤식 등에 대해서만 이단”이라고 했던가요?

정 목사님께서 제가 단지 몇몇 이단만 이단으로 삼고 다른 이단에 대해서는 이단으로 생각하지도 않고 별 관심도 없는 것처럼 아래와 같이 글을 썼습니다.

괜히 개혁신학만이 교회를 교회되게 만드는 유일한 신학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 이유가 있다. 박용규 교수 같은 현대 복음주의자들은 오직 신천지, 안상홍, 박윤식 등에 대해서만 이단이라고 하고 있다. 자신들의 현대 복음주의 신학의 구도에서는 절대로 그 이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박용규, “사랑하는 정이철 목사님께”, p.2)

박용규 교수는 정이철 목사의 붉은 글씨의 비판을 읽고, 푸른 글씨의 질문을 하고 나서, 자신이 과거에 비판했던 이단들을 지루하게 나열하며 아래와 같이 끝맺는다.

".......(전략).....저는 류광수 다락방 외에도 구원파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1992년 10월 28일 재림론의 문제점을 <신학지남>에 게재하고, <한국기독교회사>나 <신학지남> <총회 100년사> 등에 한국교회의 많은 이단들을 상술하였습니다."(박용규, “사랑하는 정이철 목사님께”, p.4)

그러고 나서 박 교수는 정 목사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제가 '오직 신천지, 안상홍, 박윤식 등에 대해서만 이단이라고 하고 있다'고 정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정확히 그 근거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사실 관계도 확인하지 않은 불성실 문제만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남을 비판하기 위하여 거짓된 환경을 설정하지 않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비판이라고 생각됩니다."(박용규, “사랑하는 정이철 목사님께”, p.4)

정이철 목사의 “박용규 교수 같은 현대 복음주의자들은 오직 신천지, 안상홍, 박윤식 등에 대해서만 이단이라고 하고 있다”는 비판에 대한 박용규 교수의 반응을 보면, 놀랍게도 박 교수는 정 목사의 비판의 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정 목사가 “박용규 교수 같은 현대 복음주의자들은 오직 신천지, 안상홍, 박윤식 등에 대해서만 이단이라고 하고 있다.”는 비판은, 박 교수의 이해대로 다른 이단들은 비판하지 않고, 오직 신천지, 안상홍, 박윤식 등만 비판했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은 다음에 서술된 “자신들의 현대 복음주의 신학의 구도에서는 절대로 그 이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와의 전후문맥 속에서 보면 쉽게 눈치 챌 수 있다. 그래서 이 정도 수준의 문장은 전후문맥을 염두에 둘 수 있는 중학생 정도의 국어 실력만 되어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박 교수가 이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한 질문을 했다는 것은, 과연 그에게 개혁주의의 산실인 총신신대원에서 신학을 가르칠 만한 자질이 있는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정 목사가 박 교수에게 “박용규 교수 같은 현대 복음주의자들은 오직 신천지, 안상홍, 박윤식 등에 대해서만 이단이라고 하고 있다”는 비판은, 박 교수 나열한 이단들을 박 교수가 비판했다는 것을 몰랐다거나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정 목사의 비판 요지는 박 교수가 현대복음주의 신학 구도 안에 있기 때문에, 일반 성도들도 눈치 챌 수 있는 이단들만 비판하고 있으며, 개혁주의 입장에서 보면, 찰스 피니와 같은 자들에게, 또는 신사도주의를 표방하는 이 시대의 목회자들에게 이단적인 위험 요소가 명백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므로 그들을 비판하는 대신에 오히려 옹호하고 있다는 취지의 비판이다.

아마도 정이철 목사가 이런 비판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현재는 이단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불건전한 집단들이나 인물들에 대해서 입 다물고 있는 일부 교수들의 안일한 태도에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고 이익을 챙기려는, 좁고 위험한 길을 피하고 넓고 안전한 길만 가려는, 진리가 아니라 대세에 편승하여 신학교 교수의 자리를 튼튼하게 보존하려는 그들의 속마음을 읽어내고, 그것을 참을 수 없었던 비느하스의 열심과 거룩한 분노가 그의 속마음에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누가 이런 자를 향해 이단이라고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글을 마치며

필자는 다시 한 번 진심으로 박용규 교수에게 부탁하고 싶다. 앞으로는 자신에 대한 정이철 목사의 비판에 대해 본질과 동떨어진 피상적인 질문으로 자신의 신학적인 문제를 회피하지 말고, 정이철 목사의 비판의 본질과 대면하여, 정정당당하게 신학적인 반론을 제기하기 바란다. 왜냐하면 지금처럼 피상적인 질문으로 시비를 거는 것은, 마치 자신을 비판한 글을 쓴 자에게 비판한 내용과는 무관하게, 사용한 필기도구를 문제 삼아 왜 그런 필기도구로 비판 글을 썼는지 해명하라고 시비를 거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기회에 박영돈 교수의 방언관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7인의 교수들을 비롯하여, 이들과 동일한 시각을 갖고 있는 총신신대원 교수들이 또 있다면 모두 함께 나서서 <바른믿음>의 정이철 목사와 필자 등과 더불어 한국교회에 만연되어 있는 방언기도에 대해 진지하게 논쟁할 것을 제안한다.

왜냐하면 필자도 정이철 목사와 마찬가지로 7인의 총신 교수들이 작성한 [정이철의 신학사상 문제점 분석과 평가논문]에서, 특히 방언기도에 대한 7인의 교수들의 이해를 접하고, 총신이 심각한 신학적인 위기에 빠져 있음을 뼈저리게 실감했기 때문이다(결국 이것은 합동 교단의 위기이기도 하며 한국교회 전체의 위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필자의 진영과 총신 교수들과의 방언 논쟁을 통해서 더욱 정제된 성경적인 방언관을 도출해 낼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총신신대원이 개혁주의의 산실로 거듭나는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 합동 교단이 한국 교회의 장자 교단답게 방언기도의 성경적인 답을 가장 먼저 제시함으로써 한국교회가 성경적인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방언기도가 정말로 성령의 은사가 틀림없다면, 방언기도를 하지 못하는 자들은 예수 믿는 자가 아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방언기도가 주는 엄청난 유익을 모르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방언기도가 거짓 은사가 틀림없다면, 방언기도를 하도록 부추기는 자들과 하고 있는 자들과 또 하고 싶어 애쓰는 자들의 영적 폐해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심판의 표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언기도가 성령의 은사인지 아니면 거짓 은사인지를 성경적으로 명확하게 규명하는 작업은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매우 긴급한 일임을 우리 합동 교단이 가장 먼저 인식할 필요가 있다.

다시 한 번 합동 교단 관계자들, 특히 신학부 임원들에게 하고 싶은 필자의 간곡한 부탁은, 난해하고 힘들고 어쩌면 매우 긴 여정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이번 기회에 우리 합동 교단이 방언기도의 성경적인 진실 여부를 공론화함으로써 성경적인 진짜 정답을 찾는데 힘을 모아 달라는 것이다.

이 작업이 한국교회의 생사여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일임을 합동 교단이 간과하지 않기를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 . .


2018년 5월 7일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 소속 이창모 목사 올림

이창모 rhicm153@hanmail.net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