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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 박용규 교수, 박윤선 박사 뒤에 비겁하게 숨다!

기사승인 2018.06.09  07:4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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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용규 교수(총신 신대원, 교회사)

들어가며

필자가 “박용규 교수의 두 가지 우문에 답하다”를 <바른믿음>(2018.05.07)에 올린 후, 어느 분의 권유로 <뉴스파워>에 실린 기사 [박용규 교수 "찰스 피니 신학 비판했다"](뉴스파워 기사입력: 2018/05/07)를 읽었다. 앞서 “박용규 교수의 두 가지 우문에 답하다”에서 필자는 [정이철의 신학사상 문제점 분석과 평가논문]과 [사랑하는 정이철 목사님께]라는 글을 쓴 박 교수에 대한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지만, 이 글을 읽고서는 이런 교수가 여럿 있는 총신은 그 동안 어디까지 갔을까 하는 깊은 좌절감에 빠지고 말았다. 왜냐하면 [박용규 교수 "찰스 피니 신학 비판했다"]는 글은, 박용규 교수가 자신의 실수를 희석시키려는 비겁한 변명임과 동시에 자신의 무지를 또 한 번 드러내는 어처구니없는 넋두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나는 찰스 피니를 비판했다!”(박용규)........ “그게 머시 중헌디?”(이창모)

정이철 목사가 찰스 피니의 부흥을 성령의 거룩한 역사라고 찬양한 박용규 교수를 비판하자, 박용규 교수는 “나는 찰스 피니를 비판했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치명적인 잘못을 덮으려는 글을 <뉴스파워>에 게재했다. 이 글에 의하면 박용규 교수는 정이철 목사가 왜 자신을 비판하고 있는지를 여전히 까맣게 모르고 있음이 분명하다.

정이철 목사가 박용규 교수의 신학사상을 문제 삼는 이유는 박용규 교수가 찰스 피니의 다른 신학사상을 비판했든지 않았든지 와는 상관없이 그의 저서와 강의에서 찰스 피니의 부흥사상, 웨일즈 부흥(1904년), 아주사 부흥(1906년) 등을 성령이 역사하신 부흥으로 평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런 정이철 목사의 비판에 대하여 박용규 교수가 “나는 찰스 피니를 비판했다”고 동문서답하고 있는 것을 보면. 박교수는 실독증(dyslexia/글을 읽을 수 없는 난독증과는 다르게, 다른 지적인 기능은 정상인데도 특별히 글을 판독하는 장애가 있는 증상)을 의심해야 할 정도로,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판단된다.

찰스 피니에 대한 정이철 목사의 비판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찰스 피니는 아담의 원죄가 우리에게 미치는 효력을 부정했다.
2) 찰스 피니는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 스스로 반응할 수 없는 인간의 타락상을 부정했다.
3) 찰스 피니는 인간에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완전한 자유의지가 있다고 했고, 스스로의 의지로 죄를 거부할 수 있다고 했다.
4) 찰스 피니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 값으로 죽으셨다는 사실을 부정했다.
5) 찰스 피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의 전가로 얻어지는 칭의를 부정하였다.

[박용규 교수 “찰스 피니 신학 비판했다”](뉴스파워)의 기사에 의하면, 박용규 교수는 정이철 목사가 비판한 것들과 표현들은 상이해도 거의 같은 맥락으로 찰스 피니를 비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박용규 교수는 이단에 가까운 찰스 피니의 치명적인 신학적 문제들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박 교수가 찰스 피니가 만들어낸 부흥을 긍정적인 성령의 거룩한 역사로 평가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아이러니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어떤 기업가가 세금포탈, 임금착취, 뇌물공여 등으로 크게 성장시킨 대기업을 놓고, 박 교수가 대기업은 성령 충만한 역사였다고 칭찬하면서, 세금포탈·임금착취·뇌물공여 등은 잘못된 짓이라고 비판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제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혈압, 당뇨는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고혈압과 당뇨의 원인이 된 비만은 성령 충만한 것이라고 칭찬할 수 있는가 말이다.

그렇다! 찰스 피니의 부흥을 칭찬한 박용규 교수는 차라리 찰스 피니의 신학 사상들을 비판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으며, 찰스 피니를 칭찬한 일로 인해 자신의 신학적 무지는 들어났어도, 적어도 자신의 실독증 증세를 의심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총신은 개혁되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거룩한 숙제 앞에 또 다시 서게 된다.
 

박용규 교수는 박윤선 박사 뒤에 비겁하게 숨다

박용규 교수는 [정이철의 신학사상 문제점 분석과 평가논문]에서는 박영돈 교수의 방언 뒤에 숨더니 여기서는 박윤선 박사의 방언 뒤에 또 숨는다. 필자는 박용규 교수의 글들에서 이런 그의 습관을 눈치 채고, [박용규 교수의 두 가지 愚問에 答하다]에서 “~특히 박용규 교수는 유명한 인간들의 방언관을 동원하는 대신에, 개혁주의 입장에서 철저하게 성경에 근거한 바른 답변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라고 부탁했다. 이 부탁은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학자가 자신의 어떤 주장을 하면서, 그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다른 유명한 학자들의 주장을 인용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뉴스파워>에 실린 박용규 교수의 [박윤선 박사도 방언의 존재 인정했다,.."다만 고전 14장의 규례를 지켜야"]의 글을 읽어보면, 방언에 대해 박윤선 박사의 의견만 나열되었지, 박 교수 자신의 주장은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 다른 이(박윤선 목사)의 주장만 나열해 놓고, 자신의 주장 없이 그냥 끝내버린 글들은 사실상 쓰지 않는 것이 낳을 만큼 아무런 가치가 없는 글이다.

왜냐하면 그 글에 관심이 있는 자라면, 거기에 인용된 박윤선 박사의 방언에 대한 의견 정도는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박용규 교수가 나열한 박윤선 박사의 방언에 대해 필자가 비판하는 것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 그 분이 제 글에 대해 다시 반박할 수 없으므로, 공평한 논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그래서 필자는 뒤에서 박윤선 목사의 방언 이해에 대해, “비판”이라는 말 대신 “평가”라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박용규 교수는 왜 자꾸, 특히 방언에 관해서, 다른 이들의 글 뒤에 숨는 걸까? 그것은 필자가 [박용규 교수의 두 가지 愚問에 答하다]에서 지적했듯이 방언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박 교수에게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박 교수는 [정이철의 신학사상 문제점 분석과 평가]에서 정이철 목사의 방언관을 문제 삼아 정 목사의 사역을 “분열을 획책하는 사탄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규정했으므로, 자신의 말에 체면을 살리기 위해서 방언에 대해 무엇인가 아는 척을 해야 하겠는데, 잘 모르는 방언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을 말하자니, 무식이 들통 날 것 같고, 그렇다고 가만있자니 교수 체면이 말이 아닐 것 같고 ..., 그래서 아마 박 교수는 박윤선 박사의 방언 뒤에 숨기로 작정한 것 같다. 맞으면 내 탓이고, 틀리면 박윤선 박사 탓으로 돌리면 되니까 말이다.

여기서 필자는 박용규 교수에게, “방언에 대해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는 능력과 확신이 없다면, 비겁하게 다른 이들의 방언 뒤에 숨지 말고, 차라리 방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권면을 하고 싶다.
 

박윤선 목사의 방언 의견에 대한 성경적 검토

[박윤선 박사도 방언의 존재 인정했다,.."다만 고전 14장의 규례를 지켜야"]에서 박용규 교수는 박윤선 박사의 방언 의견을 소개하기 전에, 그의 방언 의견 분량에 버금가는 분량으로 박윤선 박사의 화려한 프로필을 장황하게 나열한다. 왜 일까? 아마도 그것은 박용규 교수가 박윤선 박사의 화려한 프로필을 내세워 그의 방언 의견을 읽어보기도 전에 그것이 정답이라는 선입견을 독자들에게 갖도록 하려는 속셈처럼 보인다.

어쨌든 박용규 교수는 박윤선 박사의 방언 의견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사도행전 2장 1-4절을 주석하시면서 박윤선 목사님은 방언과 관련하여 2가지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첫째 오늘날 방언이 존재한다. 둘째, 사도행전 2장의 방언과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은 다르다."

박윤선 박사의 방언 의견을 검토하기 전에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은, 아무리 박윤선 박사가 신구약 성경 전체의 주석을 했고, 한국교회를 대표할 만한 위대한 신학자라 할지라도, 그도 연약한 인간이므로 언제든지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훌륭한 학자의 주장을 참고하여 연구하는 것은 귀한 일이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성경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제 박용규 교수가 요약한, 박윤선 박사의 방언에 대한 두 가지 주장을 성경을 중심으로 검토해 보자.

“첫째 오늘날 방언이 존재한다”에 대하여

박용규 교수가 박윤선 박사의 “오늘날 방언이 존재한다”을 인용한 이유는 아마도 박윤선 박사가 ‘오늘날 존재하는 방언은 정이철 목사가 주장하듯 거짓방언이 아니라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다’라고 주장했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표현은 대단히 멋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별 쓸모가 없는 말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방언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필자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 방언이 존재한다’라는 뻔한 명제가 아니라 ‘오늘날 존재하는 방언이 성령의 은사인 참 방언인가, 아니면 사람이 만들어낸 거짓방언인가?’라는 질문이며,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성경적인 정답이다.

필자는 몇 년 전, [방언, 그 불편한 진실]을 집필할 때, 박윤선 박사의 주석을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읽어는 보았다. 필자의 기억을 더듬어 한 마디로 요약하지면, 박윤선 박사는 방언에 관해서만큼은 상당히 애매한 입장을 취한 것으로 기억된다. 필자가 박윤선 박사의 주석과 그 행간에서 읽은 감상을 정리하자면, 방언에 대한 박윤선 박사의 의견은, ‘성경만으로 보면, 방언이 없는 것 같은데(박 목사는 행간에서 결코 ’없다‘라고 단정하지 않았다), 실제로는 많은 사람들이 방언을 하고 있으니까, 방언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박 목사는 행간에서 결코 ’있다‘라고 단정하지 않았다)’라는 뜻의 다소 애매한 입장을 취했다(그러나 이런 애매한 태도는 자신의 명성의 노예가 되어, 잘 모르면서도 다른 이들의 글을 인용하여 아는 척하며 다른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하려고 하는 일부 신학교 교수들보다, 또 표절을 하고도 아무 사과도 하지 않고 모른 척하는 일부 신학교 교수들에 비해, 오히려 존경할만한 박윤선 박사의 대가다운 학자의 양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용규 교수가 [박윤선 박사도 방언의 존재 인정했다,.."다만 고전 14장의 규례를 지켜야"]라는 제목에서 "다만 고전 14장의 규례를 지켜야“라는 토를 단 것도, 박 교수도 방언에 대한 박윤선 박사의 애매한 태도를 의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다만 고전 14장의 규례를 지켜야“라는 토를 달아 애매한 태도를 취한 것은, 앞으로 입증되겠지만, 박윤선 박사도, 박용규 교수도 고린도전서 14장에 언급된 방언에 대하여, 또 고전14:2, 4의 특징과 똑같은 오순절주의의 방언에 대하여 제대로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사실은 아래 박용규 교수의 설명에서도 나타난다.

“위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박윤선 목사님이 방언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는 방언 예찬론자는 아니었다.”

위의 내용은 한 마디로 앞뒤가 맞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말이다. 왜냐하면 박윤선 박사가 정말로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의 존재를 인정했다면, 오순절주의자들의 거짓말이기는 하지만 방언이 주는 영적 유익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데, 그리고 방언은 성령 하나님이 주신 은사이므로 당연히 박윤선 박사는 열렬한 방언 예찬론자가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박윤선 박사가 ‘방언 예찬론자는 아니었다’는 말은, 박윤선 박사가 방언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반증이며, 또 이런 글을 자신 있게 쓴 박용규 교수도 방언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는 결코 은사중지론자가 아니었다.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오늘날 너무 제한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이건 또 무슨 어처구니없는 말인가?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오늘날 너무 제한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말은 ‘성령의 역사를 제한시켜야 하지만, 너무 지나치게 제한시켜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이렇게 무책임한 말을 신학교 교수가 한다는 것은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물론 다른 부분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하나님에 관한 교훈을 말할 때에는, 그 교훈에 앞서 적어도 무슨 근거로 성령의 역사를 제한시켜야 하는지, 또 무슨 근거로 성령의 역사를 너무 제한시키지는 말아야 하는지를 분명히 밝히는 것이 필연적인 수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가 박윤선 박사의 모든 저작을 다 확인한 것은 아니어서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오늘날 너무 제한시키지 않아야 한다’라는 말은 박윤선 박사가 직접 한 말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위 글에서 박용규 교수가 “ ~라고 말했다”라고 하지 않고, “ ~것이 그의 지론이다”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이 말은 박윤석 박사의 주석을 읽은 박용규 교수 자신의 무책임한 추론일 가능성이 높다.

“둘째 사도행전 2장의 방언과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은 다르다.”에 대하여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전14장의 방언이 다르다고 한 것은 백번 맞는 말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전14장의 방언은 다르다’는 것은 한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자라면 누구라고 알 수 있는 뻔한 결론이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의 방언은 외국인(같은 동족이라도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큰 일’(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하는 초자연적 외국어 방언인데 반해,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그래서 사람이 대상이 아닌 하나님을 대상으로 비밀을 말한다는 방언임을 성경이 너무나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한국교회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사도행전 2장의 방언과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은 다르다”는 뻔한 명제가 아니라, “사도행전 2장의 방언과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이 왜 다른가?”를 질문하고 성경에서 그 정답을 찾는 일이다.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은사지속론자이든 은사중지론자이든을 불문하고, 성경에서 이 질문의 정답을 찾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1906년 아주사의 비극적인 사건 이후 100년이 훨씬 넘도록 방언 논쟁은 계속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교회는 더욱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 2장의 방언과 고전 14장의 방언은 왜 다른가?” 그 이유를 한 마디로 말하면,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성령이 주신 은사로서의 외국어 방언이지만, 고전 14장의 방언은 인간이 만들어낸 이상한 잡음의 거짓방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전 14장에 언급된 방언 전체를 뭉뚱그려서 다 거짓 방언, 또는 참 방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바울은 고전 14장에서 거짓방언을 지적하기 위해 수시로 참 방언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전 14장에서 거짓 방언의 대표적인 특징이 언급된 곳은 고전 14장 2절과 4절이라고 할 수 있다(물론 고전 14장에는 이외에도 거짓방언에 관한 언급들이 여러 곳에 산재되어 있다). 오늘날 오순절주의의 방언도 고전 14장 2절과 4절로 특징 지워진다. 따라서 고전 14:2, 4의 방언이 성령의 은사로서의 참 방언인가, 아니면 고린도교회가 만들어낸 이상항 잡음의 거짓방언인가를 밝히기만 해도, 오늘날의 오순절주의의 방언이 성령의 은사로서의 참 방언인가, 아니면 인간이 만들어낸 거짓방언이가를 확실하게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성경 주석을 통해 이것을 제대로 밝히려면 적어도 500페이지 정도의 책 분량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에 나타난 방언과 또 고전12-14장을 원문과 전후문맥, 그리고 당시의 고린도교회의 삶의 정황, 편지 행간에 숨어있는 바울의 마음 상태 등을 고려하면서 정밀하게 주석해야 하기 때문이다(앞으로 계속될 방언 논쟁을 통해 하나 둘 상세하게 살피겠지만, 미리 알기를 원하는 이들은 필자가 쓴 “방언, 그 불편한 진실”을 읽어보라). 따라서 오늘은 가능한 한 짧게 핵심만을 말할 수밖에 없다.

고전 14장의 방언이 거짓 방언인 이유

‘고린도전서 14장 2, 4절의 방언이 사도행전 2장의 방언과는 다르지만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 틀림없다’라는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은 아래에서 필자가 지적한 것들에 대해, 적어도 양심이 있다면, 성경적인 반박은 불가능할 것이다(다시 말하지만, 지면 사정상 여기서 정밀한 논의는 불가능하다).

1. 바울이 고전 12-14장을 기록한 이유는 당시 고린도교회를 어지럽혔던 거짓방언을 책망하고 고치게 하려는 목적이었지, 방언에 대한 강의를 하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쓴 목적은 당시 고린도교회를 어지럽혔던 심각한 영적 문제들을 책망하고, 고치도록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통해 고린도교회를 어지럽혔던 문제들을 하나하나 지적한다. 분쟁과 파당 문제를 비롯하여 성적 부도덕의 문제, 성만찬의 문제, 하물며 부활 신앙의 문제까지 고린도전서 전체에서 집요하게 다루고 있다. 따라서 고전 12-14장에서 다루고 있는 방언 문제도, 고린도전서 전체에서 일관성 있게 다루고 있는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방언에 대한 강의가 목적이 아니라 잘못된 방언 문제를 책망하고 고치도록하기 위한 목적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오순절주의자들은 고전 14장에서 바울이 다루고 있는 거짓방언을 개인용 방언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고전 14장에서 바울이 방언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들은 거짓방언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단지 ‘방언의 오용과 남용’에 관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치에도 맞지 않은 얼토당토않은 변명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고전 14:2, 4의 방언이 성령이 주시는 은사가 사실이라면, 성령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대로 주시고 역사하시는 은사를 인간이 오용하거나 남용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성령의 역사를 거슬리며, 성령의 은사를 자기 마음대로 오용하고 남용할 수 인간은 결단코 존재하지 않는다!

2. 만약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 두 종류, 즉 교회의 덕을 위하는 회중용 방언(사도행전의 방언)과 개인의 덕을 위하는 개인용 방언(고전 14:2,4의 방언)이 존재한다면, 바울은 고전 14장에서 개인용 방언을 말하기 전에 고전 12장에서 성령의 은사를 설명할 때, 반드시 두 종류의 방언의 존재 사실, 즉 교회의 덕을 위하는 회중용 방언과 개인의 덕을 위하는 개인용 방언이 있음을 밝혔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고전 12장에서 성령이 교회에 주신 은사의 용도를 언급할 때,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교회를)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는 한 가지 용도만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방언을 포함한 모든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유익을 위하는 한 종류의 은사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약 성령의 은사들 중에 유독 방언의 은사만큼은 다른 용도의 두 종류의 방언이 있다면, 용의주도하며, 또 오순절 날 제자들이 했던 방언이 외국어 방언임을 알았을 바울이, 방언의 은사를 논할 때 결코 이 사항을 빠뜨렸을 리 없다. 왜냐하면 이 사항은 방언의 은사를 말할 때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 다시 말하면 결코 빠뜨려서는 안 되는 사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전 12-13장 어디에서도, 방언의 은사만큼은 두 종류가 있다는, 빠뜨려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항이 언급되기는커녕 암시조차도 없다. 왜 일까? 그것은 다른 은사와 마찬가지로 방언의 은사도 교회의 덕을 위하는 용도의 방언만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아래의 예로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 최고의 실력의 소유자인 자동차 학과 교수가 자동차(성령의 은사)에 관한 강의를 할 때, 모든 자동차(모든 은사)가 다 육상용(교회의 덕을 위하는 회중용)이지만, 유독 지프만큼은 육상용과 수중용(개인의 덕을 위하는 개인용)의 두 종류가 있는데도 이 사항을 언급하지 않은 채 자동차 강의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프만 유일하게 육상용과 수중용이 있다는 것은 자동차 강의를 할 때, 결코 빠뜨려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항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세계 최고의 실력의 소유자인 자동차 학과 교수가 자동차 강의를 할 때 모든 자동차에 대해서 육상용만 언급한 채, 자동차 강의를 하다가 갑자기 물속에 있는 지프 이야기를 한다면, 그것은 사고 난 지프를 말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이 강의를 들은 어떤 학생이 지프를 몰고 몰속으로 돌진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자살 행위가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바울이 고전 12장에서 은사의 정의를 말하면서, 은사의 용도를 ‘교회의 덕을 위하는’ 것이라고만 말한 뒤에, 고전 14장에서 다른 설명 없이 개인의 덕을 위하는 것처럼 보이는 방언을 말하고 있다면, 그것은 사고 난 방언, 즉 거짓 방언을 말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어떤 이들이 방언을 개인의 덕을 위해 쓸 수 있는 은사라고 우기며, 뜻 모를 방언기도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영적 자살 행위가 될 것이다.

3. 결적인 것은 고전 14:2의 방언은 고전12, 13장에서 바울이 제시한 은사의 정의, 즉 방언의 정의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이다.

고전 12장에서 바울이 제시한 은사(방언)의 정의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로, 은사(방언)는 성령으로 말하는 은사이다(고전12:3). 바울은 고전 12장에서 성령의 은사를 설명할 때,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이라는 말로 성령의 은사의 주권자가 성령 하나님이심을 밝히고 있다. 반면에 바울은 고전14:2에서는 “방언을 말하는 자는 ~~~ 그 영(자신의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 말함으로써, 개인의 덕을 위한다는 방언(고전14:4)은 그 주권자가 성령이 아닌 사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전14:2의 방언은 인간이 만들어서 주도하는 거짓은사임에 틀림없다.

둘째로, 방언은 다른 모든 은사와 마찬가지로 교회의 유익을 위하는 은사이다(고전12:7). 그러므로 교회의 유익을 위해 은사를 사용하는 것은 교회를 사랑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바울은 고전 13장에서 사랑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고전14:2의 방언은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또 “알아듣는 자가” 없는 방언이기 때문에 교회를 사랑하지 않아도, 자신만 사랑하면 할 수 있는 방언이다. 따라서 이런 용도의 방언으로는 교회(사람들)에 전혀 유익을 줄 수 없다. 그러므로 고전14:2의 방언은 성령이 교회에 은사를 주신 목적에 위배되는 거짓은사임에 틀림없다.

셋째로, 방언은 성령이 그의 뜻대로 주시는 은사이다(고전12:11). 그러므로 인간의 뜻대로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일 수 없고,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일 수 없으며, 다 통역하는 자일 수 없다’(고전12:30). 그럼에도 바울이 이런 언급을 하는 것은 아마도 고린도교회에서도 성령이 그의 뜻대로 방언의 은사를 주시지 않아도, 연습만 조금하면 스스로 손쉽게 할 수 있는 거짓방언이 난무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실정은 오늘날 교회에서도 다르지 않다. 은사를 가진 자들을 교회의 몸의 지체로 비유해서 설명하자면, 오늘날 교회의 몸은 온통 주둥아리들(거짓방언을 하는 자들)로만 도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전14:2을 특징으로 하는 오늘날의 오순절주의의 방언은 한국교회를 주둥아리들만 수북하게 있는 괴물로 만들어버린 거짓은사임에 틀림없다.

 

글을 마치며

최근에 필자에게 다른 사람을 통한 어느 원로 목사님의 제보가 있었다. 그 분은 자신이 전도사로 있을 때, 박윤선 목사님과 방언에 대해 대화한 적이 있었다고 하셨다. 그때 박윤선 목사님께서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기도는 성령의 은사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필자가 여기서 이 일화를 소개하는 것은 어느 원로 목사님의 증언을, 방언기도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는 또 하나의 증거로 삼기 위해서가 아니다. 어쩌면 이 일화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으며(그 원로 목사님께는 미안한 일이지만), 또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 후에 박윤선 목사님이 자신의 생각을 바꾸어서 ‘방언기도는 성령의 은사가 맞다’라고 말하셨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필자가 이 일화를 여기서 소개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방언기도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데 있어서, 아무리 유명한 사람의 의견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의견이 정답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렇다! 다른 진리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방언의 정답의 출처도 반드시 성경이어야 하며,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라면 누구라도 인정할 수 있는 정밀한 성경 주석을 통해서 그 정답을 찾아야 한다.

바울은 당시 고린도교회의 예배를 방해하는 거짓방언을 책망하고, 퇴출시키기 위해 고전12-14장을 썼으며, 고전14:2, 4 등은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거짓 방언의 특징을 언급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살펴 본대로 고전14:2, 4과 동일한 특징을 가진 오순절주의의 방언은 그 배후에서 사탄이 미소 짓고 있는 거짓 방언임에 틀림이 없다.

이창모 rhicm15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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