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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구 박사, 영성이라는 용어를 계속 쓰는 것이 좋을까?

기사승인 2018.06.12  23: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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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다양한 입장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각의 한 부분으로 영성 생활을 언급하는 일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서, “신학의 당파성이 아니라 보편성/구체성, 절대성이나 상대성이 아니라 다원성, 탈세속성이 아니라 세속성을 추구하며 홍정수 박사가 1988년 11월 29일 개원한 세계신학연구원을 1995년 5월 15일에 확대 개편한 신학과 목회 연구소”인 한국 기독교 연구소는 그러한 종교다원주의적인 입장을 표명하면서도 영성 생활에 대한 많은 도서를 내고 강조하고 있다.

이는 오늘 날 한국 사회에서도 “영성”이라는 말이 매우 다양한, 때로는 혼합주의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단적으로 잘 보여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심상태 신부는 오늘날의 영성 운동의 과제의 하나로 다른 종교와의 대화를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며, 비슷한 입장을 강조하는 김경재 교수에게 동의하고 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 보자.

이러한 대화에서 공동적 묵상, 수행방법의 실시, 잠심, 영적 체험의 심화가 공동 대화를 위한 기초가 될 것이다. 실천적 그리스도교적 삶의 진정성이 동아시아적 명상적 종교나 아프리카-아메리카적 엑시스타시스적 종교의 체험들을 통하여 확인될 필요가 있다. 여기서 기도 안에서 성취되는 그리스도교적 신앙의 고유 가치가 드러날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21세기 한국 그리스도교계와 세계 교회는 불교, 유교, 노장사상, 천도교 등 세계적 종교인들이 체험한 영성 체험들과 깊은 대화를 통해서 영성이 새로워지고 깊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종교가 자기 종교의 정체성에 충실하면서도 개방성을 지닐 수 있는가 하는 점이 그 종교의 진정한 실력이고 영적 능력입니다”(심상태 신부)

이런 혼합주의적 경향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이런 사상이 침투할 때 더욱 더 분별하기 어렵게 한다. 요즈음 일반인들 사이에서 많이 읽히는 책의 하나인 파울로 코넬료(Paulo Coelho)의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 앞부분 작가 노트에 인용된 천주교 수도사요 영성 문제와 관련하여 자주 인용되는 토마스 머튼의 다음과 같은 말을 생각해 보라:

“영적인 삶은 사랑이다. 사람들은 타인을 보호하거나 도와주거나 선행을 베풀기 위해 사랑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그렇게 대한다면, 그건 그를 단순한 대상으로만 여기고 자기 자신을 대단히 현명하고 관대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런 태도는] 사랑과는 전혀 무관하다. 사랑한다는 것은 타인과 일치하는 것이고, 상대방 속에서 신의 불꽃을 발견하는 일이다.”(토마스 머튼)

이를 인용하면서 파울로 코넬료는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전개시킨다:

“더 많이 사랑할수록 우리는 영적인 체험에 보다 가까워진다. 참으로 깨달은 자, 사랑으로 뜨겁게 데워진 영혼은 모든 편견을 넘어 설 수 있다 ... 구체적인 사랑의 경험을 통해서만, 우리는 영적인 길에 가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코넬료)

그런데 천주교적 영성 개념을 사용해서 그가 말하는 영적인 체험은 과연 어떤 것인가? 그 자신이 말하는 대로는 “신은 그/그녀를 허락하는 곳이면 어지에든지 임한다”는 것이며, 천주교 신학생인 그의 강연의 말로는 마법의 순간, 즉 “모든 별들에 깃들인 힘이 우리 속에 들어와, 우리가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순간”이 있는데, 이 “마법의 순간은 우리가 변할 수 있도록 도우며, 꿈을 실현시키도록 우리를 멀리 떠내 보낸다”고 한다. 또한 그 신은 이 작 중 신학생의 입으로는 다음과 같이도 설명되고 있다:

“네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녀가 지구상의 모든 종교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거야. 여신, 성모 마리아, 유대교의 셰키나, 어머니 대지, 이시스, 노예이자 주인인 여인의 모습으로. 그녀는 잊혀졌고, 금지되었으며, 사람들은 그녀의 모습을 바꿔버렸지. 하지만 그녀를 위한 제의는 세기를 이어가며 계속되고 있고,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살아 있어. 신의 다양한 면모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여성의 면모야...... 모든 종교와 전통 속에서 그녀는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면서 우리 앞에 나타나고 있어. 언제나 모습을 드러내지. 나는 가톨릭 신자니까 그녀를 성모 마리아로 보는 거고.”

이와 같이 코넬료가 말하는 영적인 것은 이렇게 여성적인 면모도 간직한 신적인 것에 대한 감응, 그와의 일치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현대인들이 천주교적 영성 개념으로부터 그들 나름대로 발전시켜 생각하고 있는 영성의 모습이다.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것을 영성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난감해 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천주교적 영성 개념과 익숙히 연관된 영성 개념이나. 그로부터 현대에 발전되어 나온 새로운 영성 개념과는 다른 것을 말해야만 한다. 우리는 최소한 우리가 말하는 “영성”이라는 말은 당신들이 말하는 “영성”이라는 말과는 다른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것을 쉐이퍼처럼 참된 영성이라고 표현하거나 청교도들처럼 성경적 영성이라고 표현하는 것보다는 오늘날의 복잡한 영성의 혼란 상황 가운데서는 새로운 용어로 그것을 지칭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우리가 말하는 바를 그들이 추구하는 영성의 한 측면이나 한 방향으로 여기거나, 이것도 영성을 추구하는 한 방법이라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기독교적 영성을 말하는 분들 가운데서도 여성을 추구하는 여러 방향이 있는 중에 우리는 이런 “기독교적 영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은 그야 말로 영성의 혼동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계속 영성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도움이 될까? “영성”이라는 용어가 아니라면 우리는 우리가 추구하는 것을 무엇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일단 어떤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가 하는 것에 대한 대답은 뒤로 한 채 우리가 성경적으로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묘사해 보기로 하자.

 

이승구 교수의 블로그 / blog.daum.net/wminb/2029323

이승구 wminb@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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