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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규 교수님, 방언기도에 대한 낭설을 주장하지 마십시오

기사승인 2018.06.29  02:5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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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가 방언기도를 소재로 박용규 교수의 신학을 비판하는 글을 더 이상 쓰지 않아야 좋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다. 지난 40-50년 사이에 장로교와 합동 안에도 방언기도를 지지하는 세력이 두터워졌기 때문에 방언기도를 소재로 박용규 교수의 신학을 비판하면, 박용규 교수에게 동조할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방언기도의 문제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방언기도의 문제는 기독교에서 성경의 하나님을 근본없는 '다른 신'으로 대체시키는 음모와 관련되어 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당의 하나님과 예루살렘 성전의 하나님을 같이 보았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의 하나님은 산당의 하나님과 그것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셨다. ‘하나님’이라는 명칭이 같다고 정말 같은 하나님이라 여기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오직 성경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이다. 성경 계시와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정체는 사탄이다. 이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박용규 교수(총신 신대원, 교회사)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정이철 목사는 교만과 비방과 분열의 열매를 맺고 있기에 조심스럽게 거짓 선지자가 아닌가 진단해 본다 ... (중략) 정이철 목사 자신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단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중략) 정이철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 절대적 기준이고 그것으로 남을 정죄하고 자신을 의롭다하는 것은 영락없는 유대주의자이며 바리새인이다 ...(중략)

그는(정이철 목사) 아무런 근거 없이 자신이 뭐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교인들을(이) 헛된 환상을 갖게하고 대외적으로 관심을 끌며 스스로 바른 신학을 세우는 이 시대의 의로운 대선생인 척하는 영락없는 이단 교주의 모습이요 바리새인의 모습이다 ...(중략) 정이철은 계속해서 교단과 총회와 총신대학교를 이간하고 음해하며 한국교회를 혼란시킬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움직임을 간과하면 나중에 더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교단적인 차원에서 바로 잡아 앞으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중략)

정이철의 행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무차별적 허위사실 유포는 그 동안 권위를 인정받아 온 예장 합동과 총신을 심각하게 음해하는 해당행위를 그대로 묵과할 경우 폐해가 더욱 심각할 것으로 사료된다.”

위 내용들은 박용규 교수가 정이철 목사에게 신학적 비판을 받은 총회 서기 권순웅 목사 등과 공모하여 정이철 목사를 이단으로 몰고자 작성한 17페이지 분량의 신학보고서에 기술되어 있는 내용이다. 박용규 교수의 정이철 목사를 이단으로 몰고 싶어하는 악심이 물씬 풍기는 내용들이다. 박용규 교수가 정이철 목사를 이단으로 몰아갔던 가장 주된 신학적 논조의 핵심은 정이철 목사가 방언 기도를 강하게 부정하며, 방언기도를 인정하는 사람들을 강력하게 비판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방언기도를 인정하는 박용규 교수 자신의 신학적 주장은 무엇일까? 박용규 교수 자신의 방언기도 신학 이론은 매우 빈약했고, 주로 남들의 말을 이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쳤을 뿐이다. 최근에도 이미 세상 떠난 박윤선 박사님의 주석을 인용하면서 방언기도가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장로교회 발전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치신 주석가 가운데 한명이신 박윤선 목사님도 오늘날 방언이 존재한다고 인정하셨다 ...(중략) 박윤선 만큼 성경을 깊이 연구한 정통 칼빈주의 장로교 신학자도 드물 것이다. 그분은 주석을 쓰시면서 성령의 은사와 역사에 대해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깊이 있고 균형 있게 글을 쓰셨다. 때문에 늘 권위를 인정받으셨다 ... (중략) 사도행전 2장 1-4절을 주석하시면서 박윤선 목사님은 방언과 관련하여 2가지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첫째 오늘날 방언이 존재한다. 둘째, 사도행전 2장의 방언과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은 다르다.”(박용규, 박윤선 박사도 방언의 존재 인정했다, 뉴스파워, 2018.5.16)

박용규 교수는 계속 남이 한 말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스스로 심도있게 연구하여 자신의 소신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지금은 성경의 참 하나님에게서 벗어나 방언기도를 주는 다른 신에게 미혹된 사람들이 많은 시대이니, 방언기도를 주장한다고 해서 심각한 일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도행전의 방언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이방인의 실제 언어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명하시는 현상이라는 사실에 대해 이견이 없다. 사도행전의 방언은 하나님이 친히 그리스도의 구원계시를 설명하시는 외국어였다. 박용규 교수는 하나님의 계시가 내포된 사도행전의 방언은 그쳤고, 고린도전서의 방언기도 은사는 계시와 무관하고 지금도 있다고 한다. 즉, 박용규 교수의 주장은 기독교에 하나님에게서 사람에게 오는 방언과 사람에게서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방언, 두 종류의 방언이 있다는 것이다. 정말 고린도전서의 방언이 사람이 하나님께 은밀하게 기도하는 방언이었을까? 

"정이철 핵심, 기독교의 방언은 오직 이방인의 실제 언어"(바른믿음, 2018.5.1)

"박용규 교수 등 방언기도 옹호자들이 총신 교수 아니면 좋겠다"(바른믿음, 2018,6.20)

 

정이철 목사는 위 두 기사를 통해 고전 14장에서 방언기도 은사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고전 14장의 모호한 내용의 몇 구절들을 통해 방언기도의 신학을 세우려는 시도는 무모하다.

이제 기독교 2,000년 역사 속에서 과연 정통교회로부터 인정받은 방언기도 은사가 한 순간이라도 존재했었는지에 대해 살펴보아야 할 차례이다. 지금부터 정이철 목사가 하는 말 속에 틀린 내용이 있으면, 누구든지, 언제든지 공개적으로 지적하여 정통교회로부터 인정된 방언기도 은사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설명해 주기를 바란다. 방언, 또는 방언기도와 관련된 교회사의 사건, 인물들을 순차적으로 살펴보자.
 

1. 몬타누스파와 방언기도

삼위일체 신학에 공헌한 터툴리안이 나중에 몬타누스파(Montanist, 2세기 중반 활동)에 합류하기도 했으나, 입신과 황홀경 체험을 강조하고, 예언과 방언을 주장했던 몬타누스파는 결국 이단으로 분류되었다. 그러므로 몬타누스 파에서 나왔다는 방언 또한 사이비 현상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몬타누스파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계시적인 방언, 즉 통역으로 예언의 기능을 하게 되는 성경의 방언을 모조했다고 알려져 있다. 몬타누스파가 개인의 기도의 은사로서 방언을 시도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이레니우스, 크리소스 톰, 어거스틴과 방언기도

초대교회의 정통 신앙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데 큰 공헌을 남긴 이 세 사람의 저술들에서 초대교회 당시의 방언 은사의 상황을 알 수 있다. 이레니우스(Irenaeus, 130~202)는 이전에 방언이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는 내용만 언급했고 자신의 시대에 방언이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요한 크리소스 톰(John Chrysostom, 349-407)과 어거스틴(St. Augustine of Hippo, 354~430)은 유대인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성경의 방언은 사라졌고 자신들의 시대의 교회에서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는 내용을 언급했다. 

나는 이 분들의 원 자료를 본적이 없고 여기에 대해 언급하는 이후의 자료들을 보았을 뿐이다. 혹시 이 분들의 원 자료에 근거하여 내 말이 틀렸는지, 아니면 과장되거나 왜곡되었는지 설명해 주시는 분들이 있으면 좋겠다.
 

3. 칼빈, 종교개혁자들과 방언기도

칼빈의 제네바 교리문답 247항은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알지 못하는 낮선 언어’로 기도하는 행위를 ‘하나님을 조롱하는 행위이고 사악한 위선’이라고 규정한다.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낮선 언어란 과연 무엇일까? 실제 통용되는 외국어라면 자신이 모르면서 말할 수는 없으므로 거짓된 방언기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몬타누스파 같은 신비주의 이단들이 칼빈의 시대에도 약간 있었던 모양이다. 
 

4. 요한 웨슬리와 방언기도

웨슬리를 따랐던 사람들 중에 방언을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몬타누스 계열의 신비주의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1700년대 영국에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웨슬리 자신이 사람에게 말하는 방언이나 하나님에게 방언으로 기도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웨슬리는 자신의 설교를 들으러 온 사람들 중에서 괴상하게 웃거나, 몸을 비정상적으로 떨거나, 열광적으로 흥분하여 뛰는 등의 행동을 하는 사람들의 행태를 지지하지 않았고, 오히려 '사탄의 장난'이라고 규정했다.1) 사실 그런 현상들은 오늘 날의 거짓 방언기도와 함께 많은 현상들이 흔하게 나타나는 신사도 집회 등의 특징이다. 그런 것들을 경계했던 웨슬리가 거짓 방언기도를 성령의 은사로 인정하였을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웨슬리를 따르는 사람들 속에 몬타누스파 이단들과 같이 거짓 방언 또는 거짓 방언기도 현상을 보이는 불건전한 사람들이 있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웨슬리가 그들의 행위를 올바른 신앙의 행위로 인정하지 않았다. 


5.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흥과 방언기도

에드워즈는 철저한 칼빈주의 신학자였다. 에드워즈를 통해 두 번의 큰 부흥이 일어났는데, 1741년부터 1742년에 일어난 부흥의 시기에 다음과 같은 이상한 현상들을 많이 동반되었다:

"'갑자기 몸에서 힘이 빠짐'(Sudden physical collapse), 비정상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울부짖음'(violent agitations and outcries), '졸도하고 정신을 잃음'(swooning & fainting), '미친 듯이 뛰고 춤추고 노래하고 광적으로 기도함'(frantic jumping, dancing, singing, and praying), '황홀경'(ecstasies), '환상'(visions), '무아지경'(trances), '주관적 계시체험'(inward impressions), '몸이 마비됨'(body paralysis), '성령이 주는 황홀함에 의해 압도되어 누워있음'(overwhelmed by spiritual rapture, 입신?)"

특히 에드워즈의 부인 사라는 1742년 에드워즈가 출타하고 외부강사가 설교할 때, 이틀 동안 무려 세 번이나 황홀한 입신에 빠졌다. 이러한 현상들로 인해 에드워즈의 부흥에 대한 심각한 신학적인 논쟁이 뉴잉글랜드 전체에서 일어났다. 대각성을 지지하는 ‘새 빛파’와 비판하는 ‘옛 빛파’로 분열되었고, 하바드 대학과 예일 대학의 교수들과 더 많은 목회자들이 대각성을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 에드워즈의 부흥을 찬성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뉴저지에 새로운 신학교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지금의 프린스턴 대학이다.

에드워즈의 부흥 기간에 일어난 괴이한 현상들은 결국 에드워즈를 그 교회에서 쫓겨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에드워즈는 자신이 부흥을 일으켰던 바로 그 교회에서 쫓겨났는데, 그 직접적인 원인은 교인들이 싫어하는 성찬에 신학 논쟁을 주도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각성 중에 많이 일어난 사탄의 장난들과 광적인 현상들로 인해 교인들에게서 에드워즈에 대한 존경심이 이미 손상되었으므로 그런 불행한 결말을 맺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실제로 대각성 이후 교인들에 대한 에드워즈의 지도력과 영향력은 급격하게 감소하였다.

에드워즈뿐 아니라, 천하의 그 누구라도 사탄의 역사와 연루되거나 근거있는 이단성 비판을 당하게 되면 곧 바로 영적인 권위를 상실하게 된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교인을 많이 모으는 것을 목표로 삼지 말고 바르게 목회하는 것을 더 중시해야 한다. 중요한 사실은 에드워즈의 두 번의 큰 부흥 기간 중에 별의별 현상들이 많이 나타났으나 방언, 또는 방언기도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6. 에드워드 어빙과 방언기도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목사였던 에드워드 어빙(Edward Irving, 1792-1834)을 통해서도 방언이 나타났다. 탁월한 설교가였던 어빙은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렸으나 원죄를 부정하고 천주교 사상을 옹호하는 등의 비성경적인 사상으로 1846년 이단으로 정죄받고 장로교에서 축출당했다. 그의 집회에서 환상, 예언, 방언 등이 자주 나타나고 강조되었다. 그러나 그 현상들의 진실성은 인정받지 못했고, 초대교회의 몬타누스파와 같은 이단 계열로 정리되었다. 그는 이후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가톨릭과 개신교, 그리고 자신의 독자적인 교리가 혼합된 ‘가톨릭 사도교회’(Catholic Apostolic Church)운동을 시작했다.
 

7. 찰스 피니, 무디, 토레이의 부흥과 방언기도

2차 대각성의 중심인물 찰스 피니(Charles G. Finney,1792-1875)는 원죄를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도 부정하는 이단이었다. 피니도 성령을 강조하였고 구원받은 사람에게 성령이 또 다시 임재 하신다는 성령세례 사상을 주장했다. 그러나 찰스 피니의 설교, 책 어디에도 방언이 나타났다는 내용은 없다. 찰스 피니의 성령신학이 무디(D. L. Moody,1837-1899)와 토레이(R. A. Torrey, 1856-1928)에게 이어졌다. 그리고 토레이를 통하여 봉사의 능력과 부흥을 주는 성령세례 이론이 정립되었다.

오늘 날 토레이의 성령사상을 성경적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토레이의 성령세례 사상이 기독교 신앙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그릇된 것임을 인지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할 것이다. 무디와 토레이의 부흥에서도 방언이나 방언기도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8. 아주사 거짓 부흥과 거짓 방언

모든 방언기도 옹호자들은 현대의 방언기도의 출발점은 1906년에 일어난 아주사 부흥이라는 사실에 대해 이견이 없다. 모든 사람들이 아주사 부흥을 통해 하나님이 방언기도 은사를 교회에 주셨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아주사 부흥을 일으킨 사람들은 이단이었고, 또한 그들도 방언기도의 시대를 열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1)찰스 펄햄과 방언기도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을 2,000년 만에 다시 교회에 회복시켰으므로 오순절 운동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는 찰스 펄햄(Charles Parham, 1873~1929)은 과연 무슨 방언을 교회에 도입했을까?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하는 계시의 방언이었는가? 사람이 하나님께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하늘의 언어 방언이었을까?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하는 계시적인 방언, 즉 이방인들의 언어로 말씀하시는 방언이었다. 그래서 찰스 펄햄도 오직 하나님이 사람에게 외국말로 말씀하시는 방언을 추구하였다. 개인들이 기도하는데 사용하는 방언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적이 없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2장의 외국어 방언이 다시 나타나야만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이 재현되기 것이기 때문이었다. 

1901년 1월, 펄햄이 아그네즈 오즈만이라는 여학생에게 방언이 나오도록 안수하자, 그녀에게서 중국말 방언이 시작되었다. 이후 그 여학생은 3일 동안 영어를 말하지 못하고 오직 중국말만 했다. 그리고 글을 쓰면 중국 글자만 나타났다. 펄햄의 학생들은 모두 미국인들이었데, 그들을 통해 프랑스어, 독일어, 중국어, 일본어 ... 등 21개 국어가 나타났다.2) 펄햄 자신에게도 방언이 터졌다. 훗날 펄햄은 자신에게 스웨덴 언어 방언이 나왔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곧 이어 내 목이 살짝 돌아가더니 나에게 성령의 영광이 임했고, 나는 스웨덴 말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언은 계속 다른 나라의 말로 바뀌었다.”3)

그 당시 펄햄은 캔자스 시티 타임즈(Kansas City Times)의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방언을 말하는) 이 학생들은 그 언어들을 한 번도 공부한 적이 없습니다. 그 나라의 원주민들이 그들의 방언의 진실성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이 학생들처럼 성령세례를 받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이 세상의 어디든지 가서 배우지 않은 언어를 구사하면서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4)

그러나 이후 사람들이 실제로 외국에 가서 실험해 본 결과는 전혀 아니었다. 오순절 운동 역사신학자 빈슨 사이넌(Vinson Synan)은 LA의 ‘불타는 떨기나무 선교회’(Burning Bush Miassion)소속 알프레드 가르(Alfred Garr) 목사가 성령세례와 방언을 받은 후 인도에 가서 자신이 받은 방언을 이용하여 사도행전의 사도들처럼 복음을 전하려고 시도했으나, 결과는 완전한 실패였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방언을 선교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다는 펄햄의 가르침을 선교 현장에 적용해 보려는 놀라운 시도는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5)

그러면 1901년 1월에 펄햄의 성경학교 학생들을 통해 나타난 그 여러 종류의 외국어 방언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진리를 배우려고 하지 않고, 거짓을 사랑하는 불쌍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허락 하에 사탄이 베푸는 거짓 은사들이었던 것이다. 달리 더 할 말이 없다.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0-12)
 

2)윌리엄 세이모어와 방언기도

아주사 부흥을 실제로 일으킨 사람은 펄햄이 휴스턴에서 운영한 신학교에서 배운 흑인 윌리엄 세이모어(William Joseph Seymour, 1870-1922)이다. 과연 세이모어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하는 계시의 방언을 추구하였을까? 아니면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하늘의 언어 방언을 추구했을까?

세이모어도 당연히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하는 외국어 방언을 집중적으로 추구하였다. 세이모어 역시 펄햄에게 배운 대로,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을 회복시킨다는 종말 부흥주의에 헌신되어 있었다. 그의 주된 관심은 사도행전의 방언, 하나님의 역사를 따라 배운 적 없는 외국어로 하나님의 말을 전하는 방언 은사의 회복이었다. 

“죄에서 구원해주시고 질병을 치료해 주시며 세상의 모든 언어들을 말하게 하신 하나님을 우리 모두 높이고 경배합시다.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6)

이 내용은 아주사 부흥 당시 세이모어가 ‘고귀한 고난’(The Precious Atonement)라는 제목으로 했던 설교의 일부이며, 그가 출판했던 <사도적 믿음> 1권 1호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아주사 부흥 당시 세이모어가 하나님이 각종의 외국어들을 주셨다고 믿고 있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만일 형제 자매들이 영어로 말하지는 않고 하나님이 주신 방언으로만 사람들에게 말하고, 그리고 모든 설교자들이 방언으로만 설교하고 통역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영어로 말하는) 예언의 은사보다 못합니다. 그러나 통역한다면, 그것들은 예언의 은사와 같습니다.”7)

위 내용은 세이모어가 ‘성령의 은사’(Gift of The Spirit)라는 제목으로 했던 설교의 일부이고, 자신이 발행했던 <사도적 믿음> 1권 5호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여기에서도 그가 사도행전의 방언처럼 통역 가능한 외국말 방언을 받았고, 그것을 통역하는 순간 자국어로 주어진 예언과 같다는 주장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한 청년이 회심했고, 방언들을 받았고, 성령세례를 받았다. 그는 결핵을 앓았으나 의사로부터 다 낳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예언의 은사와 함께 많은 외국어 방언의 은사를 받았고, 여러 나라의 외국 말(‘영서’라는 거짓 은사를 의미)을 쓰는 은사도 받았고, 외국 선교지를 향한 소명을 받았다.”8)

이 내용은 <사도적 믿음> 1권 1호에 실린 세이모어의 글 속에 있는 내용이다. 배우지 않은 외국어뿐 아니라, 외국어들을 손으로 쓰는 은사, 즉 거짓된 영서 현상을 주장하는 내용이다.

이처럼 아주사 부흥에서 강조되었던 것은 방언으로 기도하는 은사가 아니라 배우지 않은 외국어 방언을 받아 외국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아주사 거짓 부흥의 난리통에서 이상한 방언기도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중시했던 것은 분명히 외국어 방언이었다. 그것을 통역하여 하나님의 즉각적인 말씀, 즉 예언과 같아지는 하나님의 계시적인 방언의 회복이 그들의 최고 관심이었다. 왜 그랬을까? 왜 방언기도가 아닌 사람에게 말하는 하나님의 계시가 담긴 방언이 아주사 부흥의 핵심사항이었을까? 세이모어의 다음의 설교 내용에서 그 이유가 드러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개인적으로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을 경험할 때, 그 증거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나타나는 방언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9)

아주사 거짓부흥은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의 개인적 회복을 추구했었다. 사도행전 2장에는 기도하는 방언이 전혀 없다. 외국 사람들에게 실제로 사용될 수 있는 외국어 방언만 나온다. 그것이 개인적인 오순절 체험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물론 그 와중에서 이상한 방언기도라는 것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수 있으나, 그들의 중요한 관심사는 배우지 않은 실제 외국어를 성령의 은사로 받는 것이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박용규 교수에게 다음의 내용을 질문하고 마치고자 한다.
 

질문 1>
박용규 교수는 아주사 부흥을 거룩한 성령의 부흥으로 추앙한다. 그러면서 아주사 부흥에서 명백하게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적인 말씀이 담긴 외국어 방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개혁신학의 핵심인 계시의 종결성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납득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박용규 교수가 계시적인 내용이 내포된 성경의 방언이 중지되었다고 본다면, 그것을 본격적으로 재현한 아주사 부흥을 마귀의 거짓 부흥으로 규정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그런데 왜 박용규 교수는 아주사 부흥을 거룩한 성령의 부흥으로 추앙하는 것인가?

 

질문 2>
박용규 교수는 하나님이 방언으로 사람에게 말하는 사도행전의 방언이 중지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계시와 무관한 하나님께 기도하는 방언은 지금도 있다고 하고, 그 근거가 고린도전서 14장의 내용이라고 한다. 박용규 교수는 이와 같은 자신의 주장을 위해 방언에 대해 바르게 가르치지 못하셨고 이미 천국가신 박윤선 박사의 글과 고신의 박영돈 교수, 그리고 외국의 어떤 사람들의 주장을 근거로 들었다. 

기독교에 방언기도 은사가 존재한다면, 마땅히 하나님의 몸인 교회에 방언기도 은사가 있어야 한다. 지난 2,000년 교회사에서 방언기도 은사가 계속 이어졌어야 한다. 박용규 교수는 정통교회로부터 공인받은 방언기도 은사의 교회사 속의 사례를 말할 수 있는가? 방언기도를 공인받았고 공식적으로 가르친 사람이 있는지 말할 수 있으신가? 

만일 대답할 수 없으면, 더 이상 방언기도를 옹호하지 말고 자숙하기 바란다. 방언기도는 사탄이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기 위해 매우 전략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미혹이다. 자세히 연구하지 않았으면 가만히 있어야 한다. 다수의 무지한 엉터리 믿음의 사람들 편에 서서 붙어가면 편하고 더 인기를 누릴 수는 있겠으나, 그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가 망가지는 것을 생각하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다음에는 박용규 교수가 부흥을 일으킨 사람으로 극찬한 오랄 로버츠 등이 얼마나 복음을 변질시킨 사람인지에 대해 계속 논의할 것이다.

 

--- 각주 ---

1)John Wesly's Journal, as Quoted in Knox, Enthusiasm, p. 53. Hank Hanegraaff, Counterfeit Revival(Orange, CA: New Century Schoolbook, 1997), p. 196에서 재인용.
2)Synan, Holiness-Pentecostal Movement, p. 102. Hank Hanegraaff, Counterfeit Revival(Orange, CA: New Century Schoolbook, 1997), p. 141에서 재인용.
3)Roberts Liardon, The Azusa Street Revival(Shippensburg, PA: Destiny Image Publishers, 2018), p. 75.
4)Synan, Holiness-Pentecostal Movement, p. 102. Hank Hanegraaff, Counterfeit Revival(Orange, CA: New Century Schoolbook, 1997), p. 141-42에서 재인용.
5)앞의 글.
6)Roberts Liardon, The Azusa Street Revival(Shippensburg, PA: Destiny Image Publishers, 2018), p. 113.
7)앞의 책, p. 118.
8)앞의 책, p. 133.
9)앞의 책, p. 126.

정이철 cantoncr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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