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구 교수

우리는 이미 지난 글들에서 오늘 날 우리 주변에서 사용되는 영성 개념에 대한 문제를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우리가 피하여야 할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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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런 문제점을 드러내지 않는 진정으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이들,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적 영성으로 충만한 이들의 모습은 과연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성령님으로 행하며,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에 대한 시금석을 우선 다음 네 가지로 제시해 보고자 한다.

1) 성령님의 힘으로 온전하고 구비된 그리스도적인 품성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된다. 즉,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가 잘 조화되어 나타나는 성령의 “한 열매”(κa'ρπος)를 내는 삶이다(갈 5:22, 23).

이 구절이 문자적으로 잘 말해 주고 있는 것과 같이, 성령의 열매는 단일한 열매(κa'ρπος)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150년 전에 맥체인(Robert Murray McCheyne)이 기도했다던 대로, “주님, 구원받은 죄인이 할 수 있는 최대한도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런 삶을 사는 이들에게서는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 숭배, 술수, 원수 맺는 것, 분쟁, 투기, 분냄, 당 짓는 것, 분리함, 이단, 시기, 술취함, 방탕함, 또 그와 같은 것들”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갈 5:19-20). 하루아침에 다 되는 것은 아니라도 날마다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적인 품성이 온전히 드러나는 삶을 향해 참된 그리스도인은 성령님에 의존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2)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성령님을 좇는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이며,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떤 상황 가운데 있는지에 유의하며 그 나라와 의를 위해 살아나간다. 성령님에 의해 인도되는 이가 하나님 나라에 대해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성령님께 온전히 순종하지 않는 것이 된다. 이 점에 있어서 한국 교회는 오랫동안 잘못된 이해를 가져 왔었고, 바른 관찰을 하는 분들이 처음부터 매우 우려할 만한 상황을 나타내어 왔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3) 하나님 나라를 중시하는 교회의 사명을 유의하면서 교회가 참으로 교회답게 그 사명을 다해 나갈 수 있도록 “교회의 지체”[敎會我]로서의 모든 활동을 성령님의 능력 안에서 열심히 하여 나갈 것이다. 교회는 항상 성령님의 능력 안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고 성령님께서 제공하는 힘 가운데서 전진할 때라야만 유효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교회는 항상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이일을 감당하여 왔고, 또 항상 그리할 것이다.

4) 그렇게 배우고 교회를 통해 드러내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따라 이 세상에서 적극적인 삶을 살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님께 순종하며 성령님에 의지하는 자는 반(反)사회적으로 살거나, 사회에 대한 관심이 없이 물러나 살지 아니한다. 그는 수도원적인 영성을 지향하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이 세상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실현해야 할 무대와 장소로 여기면서 적극적으로 살며, 급기야는 지금 여기서도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드러내려는 문화 변혁적인 삶을 살게 된다. 이런 성령의 사람에게는 성속을 지나치게 구별하는 이원론적인 삶의 모습이 있지 아니하며, 좁은 의미의 종교적 영역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주신 소명(vocation)에 따라 이 세상 속에서 주어진 일을 하며, 그 일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며, 이 땅 가운데 그런 하나님이 원하시는 문화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애쓰게 된다.

이 세상의 흐름을 유의하면서 기독교 세계관으로, 신국적 관점으로 이 세상의 문제들을 바라보면서 기독교적 노력을 힘쓰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성령님께 순종하며 인도하심을 받아 가는 것의 이 세상에서 나타나는 궁극적 열매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최종적 열매는 하나님 나라의 극치의 상태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 생황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온전히 살지 않는 오늘 우리의 모습은 우리가 얼마나 성령님의 뜻에 순종하여 가지 않는 지를 잘 보여 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이 어떤 이가 과연 성령님 안에 살면서 성령님께 순종하는 지를 잘 드러내어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강조하며 말한다면, 성령님께서 이루시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인격이 나타나지 않으며,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를 드러내는 교회의 지체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 그리하여 구체적인 일상의 영역과 사회 생활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가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은 결코 성령님께 순종하는 이들은 아니다.

아무리 성령님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성령의 능력을 강조한다고 해도 이와 같이 온전한 성령적 인격성의 드러남과 하나님 나라 중심의 태도가 나타나지 않으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령님의 역사라고 할 수 없음을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한국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이런 시금석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런 시금석을 가지고서 신중하게 판단한다면 우리는 이단의 가르침을 따라 갈 수 없을 것이고, 더 나아가서 우리 자신이 이단적 방향을 향해 나아가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일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상당히 많은 이단 종파가 성령님을 강조하고 나오는 것은 이런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의 이적과 기사를 용인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명확히 이야기 할 때는 “현재의 ‘표적들과 기사들’에는 신적인 것들보다 인간적인 측면이 더 많이 개입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며, “우리는 환상이 자연적 원인의 결과일 가능성도 있음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성령님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유의해서 우리가 이상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사이몬 챤 자신이 동방 정교회의 Evagrius의 말을 변용하여 잘 말한 바와 같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분별하는 사람이고 분별하는 사람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리고 “만약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대규모로 영적인 분별력을 갖추게 된다면, 대부분의 텔레비전 전도자들(Tele-evangelist)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오늘의 현실은 우리가 과연 어떤 상태에 있는 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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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나가는 모습

우리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항상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가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우리의 구체적 일상생활에서 과연 어떤 형태로 나타나게 될까? 먼저 추상적으로 원리만을 언급한다면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삶은 1) 하나님의 말씀의 객관적 의미와 2) 하나님과의 교제라는 주관적 요인이 함께 작용하여 나타나게 된다. 하나님 말씀의 객관적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여 그것에 따라 구체적인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하나님과의 깊이 있는 교제에 의해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나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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