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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규 교수의 웨슬리 부흥 이야기는 무난한 초교파 신학 이야기

기사승인 2018.07.24  12: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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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용규 교수(총신 신대워, 교회사)

박용규 교수는 정이철 목사가 웨슬리 칭의론 논쟁을 하다가 감리교의 교수님들에게 사과한 것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얼마 전에 정 목사님께서 감리교 웨슬리의 구원관을 행위구원이라고 주장하였다가 사과한 것을 보았는데 이번에도 그럴 것은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박용규 교수, 정이철 목사에게 드리는 두 가지 질문, 뉴스파워, 2018.5.2)

박용규 교수가 진정으로 개혁신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분이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웨슬리의 신학이 종교개혁 칭의론과 일치하는지에 대해서는 계속 논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전도할 때 천주교인들과 청교도들로부터 동시에 비난받는 경우가 많았다. 종교개혁 전통의 부흥운동에 관한 탁월한 연구자인 Ian Hugh Clary 교수는 웨슬리가 아일랜드에서 감리교 신도회(Methodists Society) 운동을 전개할 때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아일랜드는 로마 천주교가 지배하는 곳이었다. 1747년에 아일랜드에서 활동하는 감리교 설교자는 두 사람이었다. 이전의 부흥은 북부 지역의 장로교회 중심으로 일어났으나, 웨슬리는 전도는 남쪽지역, 특히 더블린(Dublin)에 많은 시간이 할애되었다. 웨슬리는 감리교 신도회 사역을 시작한 토마스 윌리엄(Thomas William)을 돕기 위해 아일랜드를 방문했고, 1747년에는 설교로 자신의 동생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1707 - 1788)를 돕고자 그곳을 방문했다. 아일랜드에서 감리교 신앙을 전파했던 웨슬리 일행은 로마 천주교와 같은 진영의 개신교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그 상황을 찰스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개신교 사람들의 지원을 받는 로마 천주교 폭도들은 너무나 사납고 잔인했다. 우리가 지나가는 길 어디에나 그들이 나타났다.’

이 당시 웨슬리와 다른 감리교 전도자들을 보호해 준 사람들은 이들의 전도를 통해 개종한 영국 군인들뿐이었다. 이러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에서의 감리교 운동은 순회전도 사역과 찬송운동을 통해 상당한 결실을 맺었다.”1)

왜 웨슬리는 천주교와 종교개혁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들 양측으로부터 고통을 받았을까? 천주교인들의 눈에는 웨슬리가 천주교 신앙에 해를 미치는 사람이었고, 칼빈주의 종교개혁 신앙을 추구하는 교회들의 입장에서는 웨슬리가 종교개혁 신앙을 퇴보시키는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수 백 년 후 종교일치 운동이 일어나자 웨슬리의 후예들이 가장 먼저 천주교와 의화교리 합의문(1999)을 작성한 것을 보면, 웨슬리의 사상이 천주교와 종교개혁자들의 이신칭의 사이의 중도노선이었다는 지속적인 논란에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주의 종교개혁신학을 배우는 총신의 학생들과 교수들은 언제나 매의 눈으로 웨슬리의 칭의 사상을 살펴야 한다.

정이철 목사는 감리교의 이수정 교수와 임성모 교수가 웨슬리의 칭의론이 종교개혁 칭의론과 일치한다고 주장하시므로 감리교 전체를 싸잡아서 비판한 것에 대해 사과했다. 박용규 교수가 진정 개혁신학자라면, 총신 출신인 정이철 목사가 무슨 연유로 감리교 교수들에게 사과를 했는지 걱정하며 알아보았어야 했다. 이와 관련하여 <바른믿음>의 한 독자는 어떤 이유로 정이철 목사가 감리교 교수들에 대해 사과를 했는지 걱정하면서 다음과 같은 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정이철 목사님,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서 개혁주의신앙을 가지고 있는 자매입니다. 항상 올바른 개혁주의 복음 전하심과 이단 분별 사역을 하고 계심에 감사드립니다. 다름이 아니라, 교수님께서(정이철 목사를 교수라고 오해하시고 계심) 웨슬리 신학과 관련하여 사과를 하신 것을 보고 의아하여 메일은 보냅니다. 보도 자료를 보고 저도 웨슬리 관련 논문들을 살펴보았는데요. 내용들을 살펴보면, 정이철 교수님께서 사과하실 일이 전혀 없으신 듯한 데, 어찌하여 사과문을 게재하셨는지 궁금하여 이메일을 보냅니다.”(바른믿음 독자)

박용규 교수의 <세계부흥운동사>의 웨슬리에 관한 부분을 읽어보았다. 웨슬리가 부흥을 일으켰다는 내용뿐이었다. 웨슬리에 대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단 한 마디도 언급되지 않았다. 과연 웨슬리가 이신칭의 신학을 바르게 믿었던 전도자였는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만일 웨슬리에게 이신칭의 신앙이 없었다면, 웨슬리를 통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신앙은 성경적이지 못했다고 보아야 한다. 아무리 잘 믿어도 행위로 칭의를 얻고 구원을 완성한다고 믿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학이 중요한 것이다.

“무리들은 영적으로 굶주려 복음에 목말라 있었고, 실제로 웨슬리의 설교에 놀랍게 반응했다. 자기의 죄를 회개하며 울부짖는 통회의 소리, 죄 사함의 감격으로 찬양하고 기도하는 소리로 설교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웨슬리가 패역한 세대를 향해 죄의 관영과 개인과 공동체와 사회의 타락을 지적하자 무리들은 회개의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강도가 어찌나 강했던지 사람들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쓰러졌다.”(박용규 교수)2)
 

   


박용규 교수는 <세계부흥운동사>에 웨슬리의 부흥운동을 이렇게 아름답게 기술했다. 실제로 그런 놀라운 일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랬으므로 웨슬리의 후예들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교단인 감리교회는 만들어 질 수 있었다. 그러나 만일 웨슬리가 '이신칭의' 신학이 아닌 '행위구원론'을 믿은 사람이었다면 어찌되는 것인가? 웨슬리의 집회에서 저렇게 기도하고 눈물을 흘린 사람들은 십자가의 은혜에 대한 감격, 그리고 그 은혜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 때문에 과연 저랬던 것일까? 만일 웨슬리가 정말로 알미니안 사상, 신인협력구원 사상, 행위구원 사상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저 사람들의 눈물과 회개의 연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래서 신학이 중요하다. 박용규 교수는 전혀 이와 같은 연구나 고민을 하지 않는다. 단지 웨슬리가 부흥을 일으켰고, 많은 사람들이 웨슬리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눈물을 흘렸고, 심지어 쓰러져 죽은 사람처럼 되었다고 했다. 회개하다가 쓰러져 죽은 사람처럼 되었다는 말을 어찌 이리 쉽게 할 수 있을까? 사도행전의 그 부흥의 현장 어디에 회개하다가 쓰러져 죽은 사람처럼 되는 모습들이 있었는가? 박용규 교수의 책을 보고 쓰러져 죽은 사람처럼 되는 은혜를 받기 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과연 그런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가장 중요한 문제, 즉 웨슬리에게 종교개혁의 핵심 사상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자. 웨슬리에게 종교개혁의 이신칭의 사상이 분명하지 않았다면, 총신의 학생들과 교수들은 언제나 웨슬리의 부흥 운동을 매의 눈으로 살펴야 할 것이다.

웨슬리에게 종교개혁의 핵심 사상이 있었는지에 관해 연구한 성결대학교 김영택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웨슬리의 회심의 해로 일반적으로 알려진 1738년 이전의 웨슬리는 ‘오직 믿음’의 교리를 이전에 들어 본 적도 없다고 할 만큼 ‘성화’를 구원의 조건으로 이해하고 이었다. 이러한 웨슬리의 말은 과장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16세기 후반 이후로 영국 국교회 내에서 청교도와 국교도 사이에 오직 믿음의 교리에 대한 폭넓은 논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직 믿음의 교리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하였다고 주장하는 웨슬리의 말에 대한 출처는 다음과 같다. 1738년 5월 14일, 24일에 윌리엄 로(William Law)에게 보낸 웨슬리의 편지를 보라.”3)

김영택 교수는 웨슬리는 자신이 1738년까지 종교개혁의 핵심인 ‘이신칭의’ 신학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근거는 웨슬리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웨슬리 자신이 한 말이다.
 

   


로이드 존스도 웨슬리가 1738년 이전까지 종교개혁 핵심 사상과는 무관했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웨슬리는) 1738년 5월에 큰 경험을 했고, 그 후 독일의 모라비안의 거주지를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 웨슬리는 크리스천 데이비드(Christian David)와 아비드 그레이딘(Arvid Gradin)의 간증을 듣고 더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두 사람은 자신들이 죄에서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으로 충만해졌다고 간증했습니다. 그들의 간증은 웨슬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지만, 동시에 자신을 개종하게 만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에 대한 자신의 이해와 자신의 체험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일어났습니다. 모라비안들의 가르침, 특히 피터 볼러(Perter Bohler)는 웨슬리를 오직 믿음으로 칭의를 얻는다는 교리를 깨닫게 했고 믿게 만들었습니다. 웨슬리는 자신이 행위로 칭의를 얻으려고 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칭의를 얻는다는 진리를 붙들기 시작했다는 것은 자신이 2년 전까지 믿었던 것을 부정해야 하는 갈등을 야기했습니다.”4)
 

존 웨슬리는 조나단 에드워즈와 같이 1703년에 태어난 인물이다. 에드워즈는 1721년 예일대학 대학원 시절에 칼빈주의 종교개혁 구원론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1723년 졸업식에서는 그 시대의 칼빈주의의 적, 알미니안 사상의 위험성을 기술하는 졸업논문을 라틴어로 작성하여 모든 교수들과 뉴잉글랜드의 유지들 앞에서 라틴어로 발표하였다. 그 후 잠시 예일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1729년부터 메사츄세츠 노스햄프턴교회에서 담임 사역을 시작했다. 얼마 후 하바드 출신 알미니안주의자 로버트 브랙(Robert Breck) 목사가 인근의 교회에 부임하는 것을 막기 위한 논쟁의 최전선에서 싸웠고, 그때 알미니안 사상의 위험성에 대해 가르치는 설교를 하던 중 1734-1735년의 대부흥을 경험했다.

에드워즈는 그 때의 부흥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었다. 그 책은 먼저 대서양 건너 영국에서 1737년에 출판되었고, 존 웨슬리도 이 책을 통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그때까지 웨슬리는 종교개혁 이신칭의 사상을 들어보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이신칭의 신앙을 모르면 무슨 복음을 전파하였을까? 믿음의 행위, 즉 성화로 구원을 얻는다는 행위구원론을 전하였을 것이다. 그것 외에 다른 것은 없다.

박용규 교수가 웨슬리의 부흥운동을 다루었으니, 적어도 총신의 교수님이시라면 이런 내용이 반드시 다루어졌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런 꼭 들어 있어야 할 내용은 없고, 많은 사람들이 웨슬리의 설교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었고, 심지어 죽은 사람처럼 쓰러지기도 했다는 이야기만 나열되어 있다. 그렇다면 독자들, 특히 신학생들이 박용규 교수의 책을 통해 무엇을 배울수 있을까?
 

웨슬리에 대해 로이드 존스는 더 심각한 이야기를 했다.

“웨슬리는 2년 동안 이전에 믿었던 신비주의 성향과 싸웠습니다. 그러나 1740년에 웨슬리는 다시 이전의 관점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웨슬리에게서 이러한 갈등은 일평생 지속되었습니다. 신비주의를 좋아하는 성향으로 시작했으나 개종할 무렵에는 신비주의로부터 벗어났습니다. 믿음으로 칭의를 얻는다는 신앙이 그에게서 우세해지면 반대로 신비주의는 가라앉았습니다.

그러나 웨슬리에게 종종 이신칭의 신학에 대한 의심과 혼동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면 신비주의 성향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웨슬리의 인생의 시기마다 신비주의에 대한 웨슬리의 각각 다른 관점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마음에 기억해 두어야 웨슬리에 대한 연구를 바르게 할 수 있습니다.”5)

 

로이드 존스는 웨슬리가 1738년에 모라비안 교도들을 통해 종교개혁 이신칭의 신앙을 배웠으나, 불과 2년 후에 다시 이전의 행위구원 및 신비주의 사상으로 돌아가 버렸다고 한다. 로이드 존스는 모든 중요한 영어 자료들을 쉽게 구하고 읽을 수 있는 분이었기 때문에, 그런 분이 하는 말이 틀리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웨슬리는 처음에 신비주의 행위구원 사상을 가졌고, 1738년 개종 이후에는 종교개혁 이신칭의 신앙을 잠시 가졌으나, 2년 후 1740년 경에 그는 또 다시 행위구원 및 신비주의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과연 이러했던 웨슬리를 통해 올바른 복음이 전파되었을까?

 

로이드 존스는 웨슬리가 성경적인 신앙으로 회심한 후 불과 2년 만에 다시 성경의 핵심 신앙을 부정하고 말았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1740년에 웨슬리는 자신이 2년 전부터 가지게 된 믿음으로 칭의를 얻는다는 사상을 설명하는 글을 작성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사실상 이신칭의를 부정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휫필드, 진젠도르프, 그리고 영국의 모라비안 교도들이 그 내용에 대해 항의하였습니다.”6)


지금까지 로이드 존스의 책들을 보니 성령세례와 부흥에 대한 내용에 흠이 있기는 하나 다른 대부분의 내용들은 우상으로 삼고 싶을 정도로 귀하고 가치 있는 내용들이다. 로이드 존스가 섣불리 틀린 말 할 사람은 아니다. 웨슬리가 1740년에 종교개혁 칭의 신학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진술했는데, 그 내용이 사실상 종교개혁 이신칭의 사상을 부정하는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휫필드 등의 믿음의 사람들과 갈등이 일어났다.

 

로이드 존스는 나중 1770년에 웨슬리가 꼭 같은 일을 또 했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웨슬리는 1770년에 동일한 일을 또 반복했습니다. 1770년에 개최된 자신의 컨퍼런스에서 행위로 칭의를 얻는다는 이전 사상으로 복귀했음을 알리는 선언문(statement)을 작성했습니다. 그 내용은 그 컨퍼런스가 발간한 소책자로 출판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당장 큰 논쟁이 일어났고, 특히 웨슬리와 아우구스투스 투플레이드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웨슬리가 이전에 했던 말들과 그 컨퍼런스에서 했던 말들 사이의 모순이 지적되었습니다. 그러나 웨슬리는 참으로 애매모호한 말들을 했습니다. 웨슬리는 사실상 자신이 말한 내용을 취소했고, 자신이 너무 과도하게 말했다고 인정했습니다.”7)

 

웨슬리의 인생에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관한 혼선이 계속 반복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웨슬리가 종교개혁 신앙, 즉 이신칭의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 아닐까? 총신의 교수님이 웨슬리의 부흥에 대하여 기술하였다면, 과연 웨슬리가 종교개혁 구원론을 확실하게 가졌었는지에 대해 학생들에게 고민하게 만드는 내용을 기술하여야 하는 것 아닐까? 단지 웨슬리가 놀라운 부흥을 일으켰다고만 기술하면, 장차 합동의 목회자가 될 학생들에게 어떤 신앙이 형성되게 될까?

 

로이드 존스는 웨슬리의 신학이 우리가 붙들어야 할 종교개혁 신학을 뒤집는 것이었다고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웨슬리의 이러한 노선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우리는 웨슬리의 그 컨퍼런스를 통해 이미 해답을 발견했다고 생각됩니다. 웨슬리의 주장들은 루터, 칼빈, 종교개혁 초기 영국의 많은 개혁자들, 윌리암 퍼킨스(William Perkins), 그리고 청교도들의 신앙의 내용을 뒤집는 것이었습니다. 웨슬리는 전형적인 지성주의자였습니다. 웨슬리는 자신을 ‘책 한권의 사람’(a man of one book)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웨슬리는 많은 책들을 읽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웨슬리의 (책들을 통해 얻은) 사고(thinking)가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것까지 통제하고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웨슬리의는 문제는 그가 너무 논리적이었다는 것입니다.”8)

 

결론적으로 로이드 존스는 웨슬리가 개혁신학이 가장 주의하고 대적해야 할 알미니안이었고, 또한 <세계부흥운동사>에서 박용규 교수가 위대한 부흥의 인물로 기술한 찰스 피니는 원죄도 부정한 더 무서운 펠라기안 이단이었다고 평가했다.

“존 웨슬리는 알미니안이었습니다. 웨슬리는 원죄를 믿었고, 또한 하나님의 은혜와 분리되어 인간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웨슬리는 하나님의 그 은혜가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그 은혜를 자신의 구원을 위해 이용할 것인지, 이용하지 않을 것인지는 인간이 선택할 문제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찰스 피니(Charles G. Finney)는 알미니안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펠라기안(Pelagian)이었습니다. 피니는 원죄도 믿지 않았습니다. 피니는 모든 사람들이 이성의 힘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붙들 수 있고, 그것의 효력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피니의 <자서전>, <조직신학>, 그리고 피니의 많은 설교들을 통해 드러난 것처럼, 피니는 항상 변호사처럼 복음을 전했습니다.”9)

 

다음은 총신의 교수님이었던 분이 개인적으로 정이철 목사에게 웨슬리의 신학의 위험성에 대해 말씀해 주신 내용이다. 독자들은 이 교수님께서 개인적으로 격의 없이 하신 말씀임을 감안하기 바란다.

“요한 웨슬리는 믿음으로 칭의 받는다는 것을 전적으로 거부합니다. 웨슬리는 믿음은 칭의의 한 조건이고, 칭의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웨슬리에 의하면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 근거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아니고, 우리가 하는 선행이라고 합니다.

웨슬리는 우리가 칭의 받으려면 먼저 회개하고 회개의 열매를 맺고 믿기로 작정하면 성령이 중생시키신다고 말합니다. 회개의 열매를 맺어 믿기로 작정하면 중생의 역사가 나타나는데 그와 동시에 사랑의 선행을 해서 성화를 이루어야합니다. 성화는 구원은혜의 도움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선행은혜 곧 모든 사람에게 다 주어진 일반은혜와 자유의지가 협력하여 성화를 이룹니다. 그리고 ‘완전성화’를 이루면 그 성화에 근거해서 칭의를 받는다고 합니다.

완전성화는 현생에서 도달할 수 있다고 하고, 또한 완전성화도 잃을 수 있다고 합니다. 완전성화는 선행을 함으로도 이루지만 또한 금욕과 금식과 고행으로 이룹니다. 그리하여 완전 성화에 도달하면 죄를 완전히 벗어나고 또 의롭게 되므로 칭의를 받는다고 합니다. 자유의지가 원죄의 영향을 받지 않으므로 일반은혜와 협력하여 완전성화를 이루고 그 완전성화로 칭의를 받습니다.

하나님이 전적인 은혜로 우리에게 구원을 선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불가항력적이 아니고, 받아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조건적 예정은 불가능하고 그런 예정은 하나님의 의, 사랑, 종교의 근본을 허무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이루셨지만, 그것은 객관적인 구원이고 신자는 그것을 내 것이 되게 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일은 자유의지가 선행은혜와 협력해서 이룹니다. 아담의 타락, 즉 원죄는 인간의 의지에 별 영향이 없어서 일반은혜와 협력해서 구원과 칭의를 다 이룰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신학적 관점에서 웨슬리의 종교사상은 자연주의 방향으로 깊이 들어가 있습니다. 구원은혜의 주권적인 역사는 전적으로 부정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구원은혜의 도움으로 선행을 한다고 하였는데, 웨슬리는 구원은혜의 역사를 전적으로 배제합니다. 하나님이 구원사역은 이루었어도, 그것을 내 것으로 삼는 일은 전적으로 내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웨슬리의 사상을 요약하면, ‘내가 나를 구원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나를 구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신학에 관한한 웨슬리는 이신칭의 교리를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그는 종교개혁의 근본진리를 전적을 부정합니다. 이신칭의 교리를 부정하거나 혼합하고 변경시키면 이단이지요. 이신칭의 교리가 종교개혁교회의 교리입니다. 이 교리를 부정하고 혼합하면 이단임이 분명합니다.

웨슬리의 신학은 비성경적이라고 단정해도 아무 무리가 없습니다. 그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훌륭할지라도 신학은 종교개혁의 진리가 아니어서 구원은혜의 역사를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웨슬리는 교리와 신학에 있어서 펠라기우스와 완전히 동일합니다. 그런데 문제점은 펠라기우스를 에큐메니칼 공회의가 이단으로 정죄하지 못한 것이 큰 문제점을 남겼습니다. 웨슬리의 가르침에 대해 개혁파 신학자들이 그의 완전성화 주장만 부정하였지, 이단으로는 정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이 개혁교회의 약점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몇몇 학자들이 웨슬리에 대해 한 말들이 다 맞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웨슬리의 어떤 부분은 개혁신학 입장에서 매우 경계해야 할 내용들이다. 웨슬리의 부흥을 기술할 때에는 당연히 이런 내용들에 대해 독자들과 학생들이 기억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닐까? 왜 이 글의 제목을 "박용규 교수의 웨슬리 부흥 이야기는 무난한 초교파 신학 이야기"라고 했는지, 박용규 교수님이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 각주 ---

1) Robert Davis Smart 외, Pentecostal Outpourings: Revival and The Reformed Tradition (Grand Rapids, MI: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6), 43.
2) 박용규, <세계부흥운동사> (생명의 말씀사, 2014), 280-281.
3) 김영택, “종교개혁 신학의 수용과 극복으로서의 존 웨슬리의 칭의론” (종교개혁 500주년 공동학술 대회: 새션 3), 407.
4) D. M. Lloyd - Jones, The Puritan: Their Origins and Successors (Carlist, PA: The Banner of Truth Trust, 2016), 308-309.
5) Ibid., 309.
6) Ibid.
7) Ibid.
8) Ibid., 310.
9) Ibid., 315.

정이철 cantoncr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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