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는 철저한 칼빈주의 목회자였고 부흥운동 신학자였다. 과연 에드워즈는 어떻게 칼빈주의자가 되었을까? 무엇이 그를 철저하게 칼빈의 종교개혁 신학을 추구하고, 칼빈의 신학 사상을 수호하는데 앞장서는 사람이 되게 만들었을까? 에드워즈가 정통 칼빈주의로 성장하고 발전하게 되는 과정을 크게 다음의 세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요소를 살펴보자. 

에드워즈의 아버지 디모데의 설교와 가르침

에드워즈는 1703년 신대륙의 대영제국의 코넥티컷 식민지의 이스트 윈저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그의 아버지 디모데 목사가 에드워즈가 태어나기 전부터 담임목회를 시작하여 60년 이상 목회했던 도시이다. 디모데는 그 교회에서 은퇴하고 약 2-3년이 지난 1758년 1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때 에드워즈도 잠시 프린스턴 대학의 학장으로 일하다가 그 해 3월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디모데 목사는 그 정도로 체력과 건강이 좋은 분이었고, 또한 60년 이상 한 교회에서 신자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목회할 정도로 성품과 신앙이 탁월하였다.

에드워즈는 1716년 예일 대학 입학을 위해 고향을 떠나기 전까지 이스트 윈저에서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10명의 누이들과 내내 함께 살았다. 이는 에드워즈의 신앙의 바탕이 아버지 디모데 목사의 영향을 통해 형성되었음을 의미한다.

 

디모데가 칼빈주의 신학으로 무장된 매우 신실한 목사였음을 보여주는 몇 가지 증거들이 있다. 1700년대 초반 뉴잉글랜드의 교회들에게 성찬의 성경적인 의미를 왜곡하는 그릇된 사상의 악 영향이 심각했다. ‘중도언약’(Half-Way Covenant)라고 불리 우는 그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이미 하나님 백성 된 신자들만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면서, 자신이 어떻게 구원받았는지를 다시 확인하고, 성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인 관계를 더욱 강화시키라는 성경적인 성찬(the Sacrament)의 의미를 심각하게 왜곡했다.

중도언약은 아직 구원받지 못했을지라도, 일단 교회에 출석하고 있고 특별한 나쁜 행위에 연루되지 않으면 누구나 성찬에 참여하도록 권장하는 그릇된 가르침이었다. 중도언약을 주장한 가장 중심적인 인물은 디모데의 장인, 즉 노스햄프턴 교회의 에드워즈의 전임자 솔로몬 스토다드였다. 스토다드는 어차피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서 누가 구원받았고 누가 구원받지 못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므로,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성찬에 참여하게 만들어 신앙성장과 개종을 유도하자는 입장이었다. 성찬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분명히 비성경적이고, 성찬의 성경적 의미를 심각하게 변질시키는 요소가 다분했다. 하나님의 거룩한 것을 돼지에게 주지 말라는 예수님의 경고를 정면으로 무시하는 위험한 사상이었다.

디모데의 장인 스토다드의 성찬 사상은 종교개혁자 칼빈의 가르침과도 거리가 먼 내용이었다. 칼빈은 오직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만 성찬에 참여할 수 있고, 그리스도인들이 찬의 떡과 포도주에 참여함으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관계를 더욱 더 강화시킬 수 있다고 가르쳤다.1)

에드워즈의 아버지 디모데가 칼빈주의 신학으로 무장된 목회자였다는 사실은 그가 당시 뉴잉글랜드 교회에서 크게 논란을 불러일으킨 중도언약 사상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디모데는 중도언약을 주장하는 스토다드 목사가 사적으로 자신의 장인이었을지라도 그의 성찬에 대한 그릇된 가르침에는 전혀 동조하지 않았다.2) 이것은 디모데 목사가 정통 칼빈주의 청교도 목사였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이다.

디모데가 철저한 칼빈주의 청교도 목사였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가 있다. 디모데는 종교적 열광주의와 인간의 참된 회심을 일으키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철저하게 구분하고 분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디모데는 인간의 진정한 개종이 일어나는 3단계 과정을 설명하고 강조하였는데, 그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진 비참한 상태에 대해 인식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디모데의 이와 같은 가르침은 그 혼자만의 주장이 아니었다. 그 시대의 정통 칼빈주의 청교도 신앙을 추구하는 목회자들과 그 이전의 청교도 조상들이 매우 강조했던 것이다.3)

또한 디모데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게 될 지옥의 참상을 생생하게 설교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설교자가 해야 할 일은 지옥으로 가고 있는 영혼들이 장차 경험할 끔찍한 고통에 대해 미리 알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디모데 자신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그는 다음과 같이 지옥에 대해 거침없이 설교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질문합니다. 여러분들이 지옥에서 단 30분이라고 견딜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지옥에서 영원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4)

디모데는 자신이 지옥의 고통에 대해 이와 같이 설교하자 아비가일 락웰(Abigail Rockwell)이라는 여성이 즉시 회개했고, 죠수아 웰리스(Joshua Wallis Jr.)라는 농부는 그 설교를 계기로 예수님에 대해 더 알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지옥의 끔찍함에 대해 이와 같이 생생하게 강조하는 디모데의 설교방식은 그 당시 칼빈주의 청교도 목사들의 주된 특징이었다. 

에드워즈는 예일 대학 입학을 위해 집을 떠나기 전까지 항상 아버지가 인도하는 예배에 참석했다. 훗날 에드워즈는 대부흥(1740-1742) 기간에 자주 꼭 그의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지옥의 끔찍함에 대해 사람들이 생생하게 느끼도록 설교하였다. 에드워즈가 아버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에드워즈는 노스햄프턴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어 목회할 때,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내용의 글을 남겼다. 에드워즈는 당시 뉴잉글랜드 교회들이 부흥을 맛보지 못하고 있었을 때, 유일하게 스토다드 목사의 교회와 자신의 아버지 디모데 목사의 교회에서 부흥이 일어났다고 회상하였다. 자신의 아버지 디모데 목사가 섬기는 교회에서 4-5 차례 놀라운 영적 각성이 일어났고, 그것이 자신의 신앙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5)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나의 영혼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확실하게 변화되기 이전 두 번의 기억나는 뚜렷한 영적인 경험을 맛보았다. 첫 번째는 내가 대학에 입학하기 전, 어린 시절 아버지의 교회에서 일어난 영적인 부흥이었다. 그 일은 나에게 여러 달 동안 큰 영향을 미쳤고, 그 일로 나는 내 영혼의 구원과 영적인 일들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다.”6)

에드워즈가 남긴 이러한 기록을 통하여 에드워즈를 정통 칼빈주의 신학자, 목회자가 되게 만들었던 많은 요소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요소는 철저한 칼빈주의자였던 그의 아버지 디모데 목사의 설교와 가르침이었다고 확신할 수 있다. 

 

 

--- 각주 ---

1) Lord's Supper in Reformed Theology - Wikipedia.
2) Marsden, 33.
3) Ibid., 26-27.
4) Ibid., 27.
5) Ibid.,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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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