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5)

지금까지 이 세상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많은 영웅들이 있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 율리어스 카이사르, 징기스칸 ... 그런데 탁월한 역사학자들은 전쟁을 지휘하지도 않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단 한명도 죽여보지도 않았고, 많은 재물과 재산을 이룩하지도 않았던 루터라는 사람이 인류의 역사에 가장 큰 변화를 일으켰다고 이구동성으로 평가합니다.

루터가 제기한 이슈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여러 나라들의 임금으로부터 시장의 상인들과 농촌의 촌부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루터가 제시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칼 한 자루도 손에 들지 않았고, 누구의 피 한 방울도 흘리게 하지 않은 루터라고 하는 연약한 사람 때문에 세상이 요동하고 뒤집어지는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루터가 이 세상에 던지 이슈는 무엇이었습니까?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 방법이 무엇이냐?” ... 이것이었습니다. 루터는 시장경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물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왕정이 좋으냐? 공화정이냐? 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 않았습니다. 루터는 오직 한 가지 “대체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 방법이 무엇이냐?” ... 이것을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을 이야기했더니 일어난 것이 무엇입니까? 종교개혁이라는 것이 일어나서 온 유럽과 세상을 뿌리부터 흔들었습니다.

루터의 말 때문에 온 유럽과 교회의 뿌리부터 흔들리는 종교개혁이 일어났다는 것은 유럽과 온 세상이 구원 얻는 방법에 대해 루터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서로 생각이 같으면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 하고 금방 끝이 났을 것입니다. 문제는 천주교회와 교황과 신부들과 그 당시 모든 세상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루터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천주교와 교황과 모든 지식인들은 구원을 받기 원하는 인간은 반드시 그만한 자격과 공로를 만들어야 한다! ...라고 믿고 가르쳤습니다.

중세의 천주교의 신앙의 구원론을 형성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신학자가 토마스 아퀴나스였습니다. 그 사람은 아리스토 텔레스의 윤리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리스토 텔레스는 윤리학에서 '정의'의 개념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어떤 공동체에서 어떤 사람이 자기가 받을 몫보다 더 많이 받아 가면 ‘불의’이고, 적게 받는 것도 ‘부당’하다. 받을 ‘자격’을 따라 바르게 분배하는 것이 정의이다.” (아리스토 텔레스)

아리스토 텔레스의 이 가르침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구원론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퀴나스는 구원에 대해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구원은 각자가 합당한 몫을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이것이 바로 천주교의 공로신학입니다. 구원을 얻을 만한 공로를 만들지 못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구원을 주지 못합니다. 구원을 얻을 만한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예수를 믿기로 결정하는 것도 그 사람의 공로입니다. 그런데 그 공로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후에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할 수 있는 삶과 신앙의 공로를 더 만들어야 하나님의 의를 얻어 구원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중세의 천주교, 그리고 그 이후의 천주교의 공식적인 구원론입니다. 천주교는 트랜트 공의회를 통하여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저주가 있을지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중세시대 유럽의 모든 사람들은 100% 천주교인들이었습니다. 유럽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얻기 위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공로를 쌓으려고 일평생 노예처럼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사람들의 마음을 불안해지고 평안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공로가 있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천주교회와 신부들과 교황은 날이 갈수록 부자가 되고, 더욱 더 욕망의 포로가 되어 타락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연옥이라고 하는 성경에 없는 것을 만들어서 일단 사람들을 죽은 사람들을 다 그곳으로 보냈습닏. 그리고 살아있는 자들에게 연옥에 있는 죽은 사람을 위해 헌금하면 좋다고 했습니다. 좋다고 하니, 사람들은 없는 형편에 헌금을 힘을 다하여 했습니다. 그러나 항상 이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체 이것이 구원을 받는 방법인가? 얼마나 공로를 더 쌓아야 구원을 얻는다는 것인가?” 

바로 그때 루터라는 신부가 로마서 4장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으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롬 4:2,3).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하심을 얻어서 구원받았습니다.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아무 기준도 없이 구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자는 의로운 자입니다. 하나님은 의롭지 않는 자를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은 분명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을 얻는가? 이것입니다. 아브라함을 그의 행위의 공로 때문에 의롭다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무슨 좋은 행위를 했으므로 하나님이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신 것이 아니고, 단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그 믿음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하셨고,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을 얻고 구원을 얻은 원리가 지금 우리에게도 동일하다고 합니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내용이 더욱 더 구체적이고 정확해졌을 뿐입니다. 로마서 4장 5절의 말씀이 루터가 온 세상의 역사에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나게 만든 말씀입니다.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5)
 

그 동안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설교를 너무 많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듣고 더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 진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경건해서 구원을 얻었다거나, 구원을 얻기 위해 인간의 편에서 조금이라도 무엇을 준비한다거나, 우리의 장점이 구원을 위해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손톱만큼이라도 남아 있다면, 오른 이 시간을 통하여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원리를 정확하게 알고 믿어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처음부터 죄인입니다. 왜 죄인입니까? 그 이유는 오직 성경에만 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조상 아담을 자기 백성으로 지으셨습니다. 아담을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가지시고, 그 백성을 통하여 기쁨을 누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식을 낳으면 고통과 비용이 따릅니다. 그런데 기를 쓰고 자식을 낳습니다. 왜냐하면 자식을 통하여 기쁨을 얻고 싶은 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왜 아담을 지으셨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담에게 하나님 백성으로 살기를 원치 않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을 주었습니다. 이 고약한 것을 자유의지라고 합니다. 하나님 백성으로 살지 않고, 자기 주관과 뜻대로 살면서, 스스로 자기의 주인이 되어 살고 싶은 마음을 가질 수 있고, 그리하기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이 그렇게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를 즐거하기를 하나님께서 기대하신 것입니다.

에덴동산 중앙의 어떤 나무의 열매가 아담의 결단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 사실을 아담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 백성으로 사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자기의 욕망과 의지대로 살려고 결단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얼마나 오래 살다가 그 열매를 먹었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길게 살기도 전에 먹은 것 같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성인으로 지어졌는데, 에덴동산에서 자식을 보지 않고 쫓겨났고, 그 후에 자식을 낳은 것을 보면 에덴동산에서는 하나님 백성으로 살았던 날이 길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을 뱀의 유혹 때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뱀은 아담의 마음에 있는 욕심과 욕망을 알아보고 단지 그것을 부추겼을 뿐입니다. 하나님 백성으로 사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하나님처럼 되기를 원하는 욕망을 품은 것을 마귀가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뱀의 혀로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부추긴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 백성으로 살기를 즐거워하지 않고, 감히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욕망을 품은 것이었습니다. 단지 뱀의 유혹이 아닙니다.

하나님 백성으로 지어진 자가 하나님 백성으로 즐거이 살기를 거부하고, 감히 하나님처럼 되고자 욕심을 품고 그 결단의 표시로 선악과를 먹었으니, 더 이상 살 길은 없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반역한 아담을 저주하고 반드시 죽여야 했고, 또한 원하시면 다시 흙을 빚어서 제 2의 아담을 자기 백성으로 만드시어 에덴동산에 살아보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죽여야 할 아담을 공의대로 죽이기를 기뻐하시지 않았습니다. 반역의 죄를 해결하여 다시 자기 백성의 영광을 누리게 해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쫓아내면서 동시에 아담과 아담의 후손들의 죄에서 건져 다시 자기 백성으로 회복시켜 주실 방법을 준비하셨습니다. 구원의 복음이 창세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 3장 15절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하시고 나서 곧 바로 아담의 반역의 죄에 연루된 사탄에게 심판을 선고했습니다. 그런데 사탄을 심판을 집행하는 사람이 신비합니다. 여자의 후손이 와서 사탄의 머리를 밟아 죽인다고 하셨습니다. 아담의 죄를 씻으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은근하게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아버지 없이 어머니만 있는 유일한 사람, 성자 하나님이 성육신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어 이담의 반역의 죄를 없이하고, 아담의 죄를 빌미로 왕 노릇하는 사탄을 심판하신다는 십자가의 복음이 이미 창세기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역이 있을 직후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고 은혜입니다.

이날 이후로 인류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진행되어진 세월입니다. 구약은 우리를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길이 준비되는 역사였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이르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었습니다. 3년간 천국 복음을 전하셨고, 원수들에게 잡히시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셨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저주를 받아 피 흘리고 죽은 것이 우리에게는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은 복된 소식입니다. 세상에 이런 경우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 사람이 저주를 받아서 피를 흘리고 죽었는데, 우리는 그 일을 복된 소식이라고 합니다. 복음이라고 합니다.

십자가에서 저주받고 피 흘리고 죽으신 그 분이 우리에게 너무도 큰 복과 선물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아담과 같은 죄인들입니다. 아담이 하나님 백성으로 살기를 즐거워하지 않고, 딴 마음을 먹고 선악과를 먹었던 그 범죄는 우리 모두의 범죄입니다. 법적으로 아담은 우리의 대표이기 때문입니다. 범죄하기 전의 아담은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도 있고,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가진 자유로운 의지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범죄 한 후 그에게 죄가 들어갔고, 그는 즉시로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죄의 종은 언제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항하는 행동 외에는 다른 것을 못합니다. 우리는 법적으로 아담이 하나님께 반역한 죄에 동참했고, 실질적으로 아담에게 들어온 죄성을 물려받았습니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하나님을 거역하기만 하고,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행동만하는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아담처럼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아 죽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은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피 흘리고 죽으신 죄 없고 흠 없는 한 사람을 준비하셨습니다. 그가 우리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고,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다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그 분이 흘리신 피로 우리가 죽어야 할 죄가 마치 없었던 것처럼 씻어졌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이 일이 우리에게 복된 소식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세주로 믿는 사람을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다시 자기 백성으로 삼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 분을 믿으면, 하나님은 우리가 실제로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은 것처럼 여겨주십니다.

우리가 조금이라고 경건해서 자기 백성으로 삼아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죄가 없으므로 자기 백성으로 삼아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조금이라고 구원 얻을 공로를 만들어서가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니, 마치 우리가 실제로 십자가에 달려 죄에 대한 저주를 받고 피 흘리고 죽은 것으로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고 죽으신 그 분에게는 아무런 흠도 없고, 죄도 없고, 모든 면에서 완전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시고 순결한 완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그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 정도가 아니면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구원을 얻으려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인간 예수처럼 흠이 없고, 거룩하고, 완전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여 주십니다. 그런데 태어날 때부터 죄인인 우리가 무슨 방법으로 그 예수처럼 흠이 없고, 거룩하고 완전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인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 완전히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그 인간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여 주셨습니다. 나는 결코 그 인간 예수의 그림자도 밟을 수 없는 더러운 죄인이지만, 나의 죄를 씻으시기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를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 분의 의로우심을 나에게 전가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믿을 때 우리에게 두 가지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는 그가 흘리신 피로 우리가 죄 값이 완전하게 배상된 것입니다. 우리의 죄 값이 완전하게 배상되었습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우리의 죄를 씻어준 것은 예수의 피 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가 우리의 죄를 씻어 주었습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흠 없고 거룩한 예수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예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을 우리에게 전가하시고 우리의 것으로 여겨주셨습니다. 우리가 경건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 변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바뀌어서가 아닙니다. 여전히 죄인일 때에 우리는 단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었을 뿐입니다. 그 분을 믿으니, 그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완전히 흠 없고 거룩하신 그 분의 의를 우리에게 덧입혀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이미 완전한 구원을 얻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믿을 때부터 우리의 구원이 시작되고, 그 뒤로 우리가 믿음의 공로를 더 쌓아서 구원을 완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정확하게 아셔야 합니다. 바로 이 부분이 루터의 종교개혁을 일으킨 부분입니다. 성경은 모든 죄인들이 여전히 죄인의 상태에서 오직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믿을 때에, 예수의 흘린 피로 죄 사함 받고, 예수의 의를 전가 받아 완전한 구원을 이미 얻는다고 합니다. 그 근거가 바로 로마서 4장 5절입니다.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홀로 다 하셨습니다. 우리가 보텐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구원을 위해 우리가 무엇인가를 조금이라도 했다는 생각이나 마음은 뿌리까지 뽑아서 버려야 합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구원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구원이 어떻게 주어졌는지 모르면서 구원받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겠어요? 경건이건, 헌신이건, 학력이건, 기도이건, 선교이건, 봉사이건 ...조금이라도 인간이 하나님의 의를 얻기 위해 무엇인가를 만들었다고 주장하거나 생각하는 것은 복음이 뭔지를 모르고, 구원이 뭔지를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시작은 하나님의 택하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으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믿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셨고, 성령께서 믿지 않을 수가 없도록 먼저 은혜를 주시었으므로 우리가 자발적으로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믿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저주와 피가 하나님의 용서와 의를 얻기에 충분하지 않다면 우리는 구원을 못 받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되신 예수는 아무 죄가 없으셨고, 율법과 윤리와 모든 면에서 흠이 없으셨습니다. 흠이 없으신 예수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충분히 넘치도록 저주와 진노를 당하셨으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풀리셨고, 우리의 죄가 없었던 것처럼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의 의가 우리의 의로 전가된 것입니다.

예수가 외로이 홀로 다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순간에도 방관자들이었고 죄악 가운데서 살았던 죄인들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홀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틀을 밟는 자 같으냐 만민 가운데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무리를 밟았고 분함으로 말미암아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튀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사 63:2,3)

이 말씀에서 어떤 사람이 왜 너의 옷이 피로 물든 첫처럼 붉으냐? 라고 물으니까, 어떤 다른 사람이 “만민 가운데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 ..”라고 합니다. 두 번째 대답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시는데 필요한 일을 아무도 돕지 않는 가운데 홀로 외로이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나 행동이 우리를 의롭게하는 것이 아니고, 홀로 외로이 포도즙틀(십자가의 고난)을 밟으신 예수의 고난과 피가 우리를 의롭게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것을 얻게하는 공로가 아니고, 죄 사함과 그리스도의 의를 얻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에게 주신 선물(통로)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는 4장 5절은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기나니”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경건하지도 못하는 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얻는 방법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입니다. 무엇이 믿음인지 온 세상 교회들이 혼동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하심을 얻는 믿음을 성경대로 이해하고 붙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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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