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는 전 세계교회에서 매우 드물게 교파적으로 장로교회가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데 주일 예배의 순서에서 축도가 루터나 칼뱅이 행하고 루터교회와 유럽의 개혁교회들이 사용하는 ‘아론의 축도(민 6:24-26)’가 아닌 미국 침례교회와 미국 장로교회의 일부에서 사용하는 ‘바울의 축도(고후 13:13)’가 한국에 들어 온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아서 사용했기에 안타깝게 아론의 축도를 사용하면 신자들이 이상하게 여기는 현상이 생겼다.

그런데 과연 개혁주의 교회에서 아론의 축도가 아닌 바울의 축도를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해 개혁주의 신학적 사고를 해야 할 시기가 되었는데, 이유는 바울의 축도의 본문이 사실상 축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그동안 한국교회는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의 본문에 대해서 제대로 연구하였다면 축도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본문에 대해서 연구한 신약학자 김창선 교수는 “바울서신에 나타난 축도의 의미”에서 논하기를 다음과 같다.

“고후 13:13에 나타나고 있는 바울의 축도는 예배의 마지막 순서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구체적인 편지문 가운데 그 마감어로 사용된 것이다. ... (중략) ... 결국 바울은 서신의 끝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하면서 자신과 고린도 교인들 사이에 생겼던 앙금을 넘어,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있는 한 형제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편지문 가운데 그 마감어로 사용된 것”을 쉽게 말하면 본문은 사실상 축도가 아니라 편지의 마지막 인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본문에 대해 연구한 신약학자 조석민 교수는 자신이 쓴 “이해와 설교를 위한 고린도후서 주석”에서 논하기를 다음과 같다.

“바울의 인사는 거의 정형화 된 것이었습니다(살전 5:28; 갈 6:18; 고전 16:23; 빌 4:23; 몬 25; 롬 16:20). 오직 성령 안에서만 공동체의 모든 다양한 구성원이 하나 됨을 이룰 수 있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목사의 축도로만 사용되지만 본래 모든 그리스도인이 일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문안 인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사는 인격적인 교제가 이루어졌을 때 자연스럽게 마음에서 우러나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상대방을 축복하고 인사를 나누는 일은 매우 귀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게 진심을 담아 성삼위의 이름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이렇게 인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이 파격적이라 볼 수 있지만 성경신학적 논리로 바른 것이고 두명의 신약학자는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주일예배의 순서의 마침인 축도의 본문이 사실상 축도가 아닌 것을 잘 가르쳐 주고 있다. 즉 본문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마지막 인사말이지 축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성경신학적 이해를 가진 루터와 칼뱅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아론의 축도를 사용한 것이고 주후 1526년에 루터교회는 아론의 축도를 공식화하였다.

그런데 낙스와 청교도들은 아론의 축도만이 아니라 바울의 축도를 사용하였고 19세기 복음주의자들에 의해서 교파를 넘어서 대중적인 축도로 된 것은 본문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되어 있는 것이 영향력이 켰고 이러한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은 한국의 주일 예배에 바울의 축도를 전해 준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바울의 축도는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아론의 축도와 다르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이 아니고 아론의 축도가 제사장들에 의해서 행해졌고 회당예배에서 사용한 역사적이고 정통적인 축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축도는 분명하게 성례전적 요소이기에 예배에서 예언자적이며 제사장적 기능을 행하고 있는 목사만이 할 수 있기에 바울이 보낸 편지의 마지막 인사말이 아닌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사장들이 행한 아론의 축도를 알았기에 당시의 중세교회처럼 사제에 의한 것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틴 루터와 마틴 부처가 행한 것이다.

그리고 예배신학적 관점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는 바울의 축도를 할 때에 끝에 가서 목사가 개인적인 말들을 붙여서 하는 것은 성경 본문을 무시하는 위험한 행동인데,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의 다수가 행하고 있고 여기에 “있을지어다”“축원하옵나이다”라는 표현이 논쟁이 되는데, 본문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보내는 편지의 마지막 인사말이며 신자들을 위해서 이 편지를 쓰며 기도한 것이기에 “빕니다”로 새번역 성경(2002)이 번역한 것은 잘한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교회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마지막 인사말이 아닌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고 제사장들이 행하고 회당예배에서 행하였고 루터와 칼뱅이 행했고 루터교회와 다수의 개혁교회가 행한 올바른 성례전적 요소인 ‘아론의 축복’으로 주일 예배에서 행할 때에 신자들의 삶이 복이 됨을 알아야 한다. 즉 개혁주의(사실상 칼빈주의)는 철저하게 ‘성경중심’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고 그동안의 한국의 개혁주의 교회들은 성경적, 신학적 반성을 하고 개혁해 나가야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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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옥 목사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개혁신학연구원, Knox Theological Seminary(D.Min.), Grace Theological Seminary(D.Miss.Pro.)에서 공부하였고, <성찬식을 어떻게 행할 것인가?> 등 6권의 저서와 1권의 공저를 출판하였다. 전, 개신대학원대학교 강사였고, 현재는 경북 영주의 바른교회를 담임하고 있으며, 바른성경아카데미(RBA) 원장으로 사역을 하고 있다. 올바른 개혁주의 신앙을 위해 실천하려고 연구하는 실천신학자이고, 또한 장례지도사로서 지역 사회를 섬기고 있다. potentia-dei@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