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신동식 목사의 권유와 인도로 출판사 우리시대에서 「영분별을 위한 신학좌표」를 처음 출판했었다(2017년). “신학좌표”라는 말은 지금도 생소한 것 같다. 그러나 신학하는 사람, 신학을 이해하려는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신학좌표(神學座標, theological latitude, theology coordinate), theological latitude를 구글에 검색하니 GPS을 근거로 신학교 위치가 나왔다. theological latitude, theology latitude는 외국에서도 사용하지 않는 개념인 것 같다. 신학좌표는 문자의 의미대로 “신학에 어떤 포인트 위에 신학하는 사람이 서 있다는 것”이다.

GPS는 위도(緯度, latitude)와 경도(經度, longitude)가 만나는 점을 기준으로 삼는 것처럼, 신학에서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좌표(이해준거)가 있다는 것이 신학좌표이다. GPS의 위도와 경도가 만나는 점을 알면 정밀타격, 긴급출동, 내비게이션 등이 가능하다. 군인, 소방관, 경찰관에게 좌표는 매우 중요하다. 항해와 항공 운항에서 사용되었던 GPS는 이제 일상생활까지 들어왔다. 일상생활에서 위도와 경도를 알지 못하지만, 위도와 경도(좌표)를 근거로 우리는 이동하고 있다.

지구 위에 좌표를 그어 놓았는데, 신학에도 좌표가 있다는 것이고, 그 좌표를 설정해야만 정상적인 의사소통, 학문교류가 가능하다는 개념이다. 나의 좌표와 너의 좌표를 알 때라야 정확한 교류가 발생한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암묵적인 인지에서 교제하고 있다. 그래서 속았다, 그럴줄 몰랐다, 배신했다 등등 이상한 말을 한다.

그것은 속은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좌표를 바르게 인지하지 못한 것일 수 있고, 나의 좌표를 바르게 인지하지 못한 경우일 수 있고, 둘 다 인지하지 못한 경우일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좌표를 모르면서 상대방의 좌표를 알 수 있다는 것은 절대로 가능하지 않다. 소크라테스의 제1명제, 인식의 제1명제는 “너 자신을 알라”이다. 군사학의 대가인 손자도 지피지기면 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이라고 했는데, 뒤에 나오는 말은 적을 알지 못하고 나만알면 1승1패, 적도 모르고 나도 모르면 매전필태(不知彼而知己 一勝一負 不知彼不知己 每戰必殆)이다.

신학좌표(神學座標, theological latitude), 우리시대는 자기 신학 좌표를 말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자기 신학 좌표를 모르는 사람은 결코 전장에 들어올 수 없고, 만약 들어온다면 결코 이길 수 없다. 신학 좌표를 모르는 대군(大軍)이 소수의 신학 좌표를 아는 군대를 인해전술로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승리는 인간승리이지 학문의 승리가 될 수 없다. 르와르 영화에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 학문 현장에서 발생한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신학 연구자들은 반드시 자기 좌표를 제시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좌표게임(FORTRESS 2RED), 신학이해 그리고 신학토론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의 신학좌표는 무엇인가? 단순하다. 장로파 목사이다. 칼빈의 후예는 크게 4부류였지만, 프랑스 위그노와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계열은 역사에서 명맥이 사라졌다. 두 계열을 네덜란드 개혁파가 취합해서 표준문서(벨직 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에 주교주의(episcopal)를 거부한 교회질서, 장로 정치를 확립했다. 주교주의(감독주의)가 교황주의를 개혁하지 못한 상태이고, 성직의 계급화를 완전히 개혁한 장로 정치를 실현한 것이다. "Quid non jubet, vetat" 성경이 명하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 금한다(존 칼빈).

스코틀랜드 장로파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채택 과정에 8명이 결의권이 없이 참가했지만 표준문서로 채택했다. 스코틀랜드 총회로부터 임명받은 8명의 위원들은 로버트 베일리, 조지 길레스피, 알렉산더 헨더슨, 사무엘 루터포드, 로버트 더글라스 등 5명의 목사와 아리스톤의 존스톤 등 3명의 평신도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산물인데, 스코틀랜드에서 채택했다. 영국은 한 왕국 두 종교(성공회와 장로파)를 이루게 되었고, 다양한 종파의 본산을 이루었다. 16-17세기 청교도주의는 현재 모든 개신교 분파의 원류가 될 것이다. (대륙에서 시작했던 네덜란드 개혁파, 루터파, 재세례파, 알미니안 등은 제외)

20세기 조선에 모든 개신교 종파들이 들어왔다. 후기에는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그리고 이슬람, 중국 이단 종파 등 모든 동,서양의 종교는 한국에 집합되었고 성장하고 있다. 다양한 개신교 교파들은 각각 자기 좌표를 갖고 있다. 자기 좌표를 명확하게 밝히는 것이 상호 유익이 된다는 것이 신학좌표의 기본 개념이다. 상대방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좌표를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다.

필자는 칼 바르트 신학을 비평하는데, 그것은 바르트를 개혁파의 주요 인물로 분류하는 경우가 있고, 개혁파 안에 동조하는 풍토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럼에도 나의 신학 좌표를 명료하게 밝히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는다.

1) 나의 주와 구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2) 예수의 은혜로 죄사함과 영생을 선물로 받았다.

3) 복음을 땅끝까지 생명이 다하기까지 전하려고 한다.

4) 복음의 요체는 오직 성경에 있기 때문에, 성경을 해석에서 복음을 밝혀야 한다.

5) 복음이 선포되면 죄사함이 이루어지고 교회가 설립되고 확장된다.

6) 교회가 성장하면 가난한 자에게 기쁨과 소망이 된다.

지금은 기독교 종파의 홍수 시대이고 포스트모던 사회이다. 그 홍수 속에서 먹을 물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먹을 물은 반드시 방주 안에만 있다. 생수의 근원은 어린양의 보좌에 있다. 홍수라 할지라도, 물 위에 있는 방주로 생수를 보좌에서 공급해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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