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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칼빈의 신학에는 그리스도의 율법순종의 의 사상이 전혀 없다

기사승인 2019.03.16  00:3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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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서철원 박사의 <교의신학전집>과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매일 탐독한다. 신학이 점진적, 시대적 발전 과정을 거쳐왔으므로 칼빈 같은 인물이라도 자신과 이후 학자들이 축적한 지식들을 바탕으로 더 정교하고 선명한 신학을 세워가는 후대의 재능있는 학자와 비교될 수 없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칼빈이 만들어 낸 신학의 '판'은 너무도 귀하고 소중하다. 칼빈도 말했으나 흐릿하였던 것이 서 박사님의 작품에서 더욱 선명해지고, 또는 칼빈에게서 부족했거나 없었던 것이 서 박사님의 작품에서 교정되거나 정립되는 점들을 본다.

칼빈이 원죄에 대해 어떻게 이해했었는지 유심히 보았다. 원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의해 기독교 신앙이 달라지기(틀어지기) 때문이다. 원죄를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아담이 율법 안에서 지어졌고, 율법을 지킴으로 영생으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행위언약 신학이 들어서고, 이어서 예수께서 실패한 아담 대신 율법 조항들을 준수하여 자신과 우리들에게 필요한 하나님 백성의 의를 취득하여 전가하였다는 ‘능동적 순종의 의’ 교리도 따라온다.

그러나 칼빈의 신학에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의 획득, 전가 사상은 찾을 수 없다. 하나의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그리스도가 율법을 준수하여 의를 획득하여 전가했다는 이론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실제 죄인이 되었다고 본다. 그리스도가 첫 아담처럼 율법을 준수하지 못했다면 그 자신도 죽었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그리스도가 자신을 위해서도 율법에 순종했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 교리를 비판하는 서철원 박사님도 이 점을 분명하게 지적하였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의를 얻기 위해 율법준수를 이루신 것이 아니다. 의는 생존권을 뜻하는데 그리스도가 율법을 다 지켜서 의를 획득했다고 하면 그를 죄인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 (서철원 박사, 「교의신학전집 4: 구원론」, 115)

놀랍게도 벌코프, 바빙크 등의 저명한 개혁신학자들의 글에서도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율법 순종과 고난이 그리스도 자신까지 구원하는 듯한 내용이 나타난다. 심지어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칭의를 받았다고 말하는 신학자들도 있다. 칼빈과 서철원 박사의 신학에서는 그런 내용이 감히 얼씬거리지 않는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고 누군가 나를 반대하여 생명과 구원이 하나님께로부터 그리스도께로 주입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구원받은 분이 아니라 바로 구원 자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존 칼빈, 기독교강요, 1.13.11)

“롬바드(Lombard)와 스콜라학자들(the Schoolmen)처럼 그리스도가 자신을 위해 어떤 공적을 쌓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무 무모하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 대체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에게 자신을 위해 자신을 위해 필요한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 지상에 내려오셔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존 칼빈, 기독교강요, 2.17.6)

그리스도에게 구원이 필요하지 않았고, 그리스도는 오직 죄로 죽어버린 자기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대신 피 흘리려 속죄하기 위해 오셨다고 보는 존 칼빈에게 그리스도가 자신과 우리를 위한 의를 얻기 위해 율법을 준수하셨다는 능동적 순종의 의 교리가 자리할 수 있는 공간은 보이지 않았다.
 

칼빈의 아담의 원죄 이해의 키워드는 ‘반역’

오직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이 우리에게 의와 구속을 주었다고 보는 신학의 원죄 이해의 키워드는 ‘반역’이다. 이미 영생을 가졌고, 항상 하나님을 섬겨야 할 사명 안에서 창조된 아담이 하나님 섬김을 거부하고,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반역’을 결행하려고 선악과를 범하였다. 그러므로 부득이 하나님께서 아담을 저주하시었다. 이것이 칼빈의 원죄 해석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아담 대신 모든 율법을 준수하여 하나님 백성의 의를 취득함으로 자기 자신과 우리를 살렸다고 보는 사람들의 원죄 이해의 키워드는 ‘실패’이다. 하나님께서 불완전하고 영생도 없는 아담에게 영화로운 상태와 영생을 주시기 위한 조건으로 율법을 제시했으나, 아담이 스스로의 힘으로 율법들을 지키는데 실패하였으므로 저주받고 죽음에 처해졌다고 한다.

아담의 원죄를 이해하는 칼빈의 키워드는 무엇일까? 아담의 원죄를 설명할 때 칼빈이 주로 사용한 단어들은 다음과 같았다: ‘만족’, ‘교만’, ‘한계’, ‘반역’, ‘하나님과 동등’, ‘하나님께 배신’, ‘은혜’, ‘감사’, ‘하나님께 영광’. 이 단어들 중에서 칼빈이 원죄를 설명할 때 사용한 가장 의미있게 사용한 단어는 ‘반역’이었다. 하나님 백성으로 지어진 은혜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반역한 것이 아담의 죄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칼빈이 아담의 원죄를 설명하는 말들을 직접 보자.

“아담의 죄를 탐욕에 의한 무절제라고 하는 일반적인 생각은 유치하다. 이것은 마치 하나의 과실을 먹지 않는 데 최고의 미덕이 있었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 것과 같다. 그때의 축복받은 그 기름진 땅에는 여러 곳에 즐거움을 주는 것들로 풍성했고 또한 풍성했을 뿐만 아니라 즐길 수 있는 종류도 굉장히 많았을 텐데 말이다.” (존 칼빈, 기독교강요, 2.1.4)

칼빈은 단지 먹지 말라고 명하신 과일을 먹은 것을 원죄의 본질로 본다는 것은 매우 유치한 발상이라고 했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 교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담이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과일을 따 먹은 것, 즉 불순종이 원죄의 본질이라고 한다. 그 이전에 하나님 백성 됨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고, 하나님을 대리하는 지상의 왕으로 세워주신 은혜에 만족하지 않고, 먹지 말도록 명하신 과일을 따 먹은 불순종에만 관심을 집중하여 원죄를 설명한다. 

“그러므로 아담이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여 벌을 받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참으로 교만이 모든 악의 처음이었다는 어거스틴의 단정은 옳다. 사람이 자기의 처지에 만족하고 바른 한계를 넘으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태초의 상태에 머무를 수 있었을 것이다.” (칼빈, Ibid)

칼빈은 원죄의 본질을 아담이 하나님의 백성 됨 안에서 창조되었고, 하나님 섬김의 삶이 그의 본분으로 정해졌으나, 그가 교만한 마음을 품었으므로 자신의 한계를 넘어 하나님처럼 되려고 의도한 것을 원죄의 본질로 보았다. 사실 이렇게 원죄를 해석해야만, 하나님께서 왜 아담을 잔혹하게 저주하셨는지가 설명된다. 

“그러나 그 후로 야심과 교만이 배은망덕과 함께 생겨났으니, 아담은 받은 것 이상을 원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주신 그 위대하고 풍성한 은혜를 파렴치하게 경멸했기 때문이다. 흙의 아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고도 또한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지 않는 것을 사소한 일로 보았으니 이 얼마나 해괴하고 흉악한 태도였는가!” (칼빈, Ibid)

칼빈은 흙으로 지어진 피조물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감히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욕망을 실행하여 선악과를 범한 것이 원죄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하나님의 존귀한 백성으로 지어진 아담이 이미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고, 하나님 섬김을 벗어나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마음 먹는 교만이 원죄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아담이 그의 창조주와 연결되어 있던 것이 그에게 영적 생명이 되었던 것과 같이, 창조주에게서 멀어진 것은 곧 영혼의 죽음을 말한다. 아담이 하늘과 땅의 전체적인 자연 질서에 위배했을 때, 그 반역으로 인해서 인류를 파멸에 다다르게 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존 칼빈, 기독교강요, 2.1.5)

칼빈은 아담의 하나님 섬김에 대한 거부 표시, 즉 피조물의 창조주에 대한 반역이 원죄의 본질이며, 그 반역 때문에 아담이 저주받았고, 그 효력이 모든 피조물에게 미쳤다고 보았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을 풍성하게 받았을 때에 그 은혜를 감사하지 못했으며, 받은 축복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을 잃어버린 지금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하나님을 인정하며 적어도 자기의 부족함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존 칼빈, 기독교강요, 2.2.1)

칼빈은 아담의 원죄의 본질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송의 자세에서 벗어나 스스로 그 이상을 성취하려는 욕망을 가진 것으로 보았다. 아무 부족함이 없이 지어진 아담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지 않았으므로 타락이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이상으로 살펴본 것처럼, 칼빈의 신학에서 그리스도가 아담 대신 율법을 준수하여 하나님 백성의 의를 얻고 전가한다는 능동적 순종의 교리는 설 자리가 없다.

칼빈은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복음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 능동적 순종의 의 교리가 성립되려면 인류에게 처음부터 율법이 있었다고 보아야 하는데, 칼빈은 십계명과 율법이 모세 시대에 주어졌다고 보았다 (존 칼빈, 기독교강요, 1.7.1.).

2) 능동적 순종의 의 교리가 성립되려면 율법에게 의를 얻게 하는 능력이 처음부터 있었다고 보아야 하는데, 칼빈은 율법 죄를 깨닫지도 못하고 죄와 함께 살아가는 죄인들이 죄를 분별하게 만들려고 왔다고 가르쳤고(기독교강요, 2.7.2.), 율법의 궁극적인 기능은 오직 구원자 예수를 고대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기독교강요, 2.7.2.).

3) 능동적 순종의 의 교리를 지지하는 신학은 예수께서 율법 조항들을 모두 준수하시는 방식으로 ‘율법의 완성’, ‘율법의 마침’을 이루었다고 주장하는데, 칼빈은 궁극적으로 예수께서 율법의 요구대로 죽으심으로 죗값을 치르시어 죄인과 하나님을 화목하게 하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기독교강요, 1.6.2.).
 

   


현재 한국 교회 내에서 칼빈의 신학 사상을 가장 선명하게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학자는 서철원 박사라고 생각된다. 서철원 박사의 신학과 칼빈의 신학은 동일한 노선에 서 있고, 어떤 부분에서는 칼빈에게서 조금 희미하고 미약하였던 요소들이 서철원 박사를 통하여 더욱 선명해기도 한다. 서철원 박사는 가장 선명하게 아담의 원죄의 본질이 하나님 섬김의 거부, 즉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라고 진단한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방식도 사도 바울, 칼빈처럼 창조주가 친히 피 흘릴 수 있는 사람이 되시어 죄를 대신 짊어지고 율법대로 죽으심으로 죗값을 배상하여 죄인과 하나님이 화목하게 만드는 방식이라고 가르친다.

“첫 인류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되었으므로 창조주는 그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며 찬양과 경배를 받으셨다 (창 2:2,3) ... 창조주 하나님은 아담과 언약을 체결하시고 언약백성이 의존해서 살 계명으로 선악과계명을 주셨다. 선악과 계명은 하나님 명령대로 창조주만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을 말한다. 곧 창조주를 하나님으로 섬기면 그것이 선이어서 생명에 이른다. 반대로 하나님 섬기기를 거부하면 그것이 악이어서 죽음에 이르게 정해진 것을 말한다. 선과 악은 전적으로 하나님 섬김 여부로 결정된다.” (서철원,「교의진학전집 5: 구원론」, 36-37)

“창조주는 큰 호의로 아담을 지으시고 그에게 창조세계의 다스림을 맡기셨다. 그러나 아담은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서기로 한 것이다. 이런 반역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범죄 후 하나님은 그 백성을 심판하셨다. 하나님은 백성에게 베푸신 많은 은사들을 거두시고 죽음을 선언하셨다. 반역에 대한 값은 죽음으로 정죄되는 것은 당연하였다 (롬 6:23).” (Ibid., 38)

“하나님의 아들의 속죄사역으로 이룬 죄용서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죄인에게 전가하여 그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만이 죄인들이 의롭다 함을 받을 유일한 근거이다. 하나님은 아들의 구속사역 곧 죄용서를 죄인들에게 전가하여 그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도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없었으면 죄인들을 의롭다고 하실 수 없다.” (서철원,「교의진학전집 5: 구원론」, 122)  

정이철 cantoncr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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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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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동사리 2019-03-28 18:24:35

    율법을 대신지켜준 "대행의 의"와 십자가 "대속의 의" 이 2가지 의를 전가해준것이 사실이라면 율법을 대신지켜준 의가 말씀에서 발견되지않고 믿어지지 않아서 인정하지않으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가 충분히 충족되지 못한 복음이 복음 되지 못한 의의 결핍이 발생하나요? 그렇다면 십자가 대속 만으로는 부족한가요?

    율법은 죄를 깨닫게하여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으로서 택자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위해 불택자의 이미임한 심판을 더욱 심판되게 하기위해 모든 사람을 율법아래 두신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그 율법의 기능에 있지도않은 구원기능을 부과하는건 말씀을 가감하는짓이 아닌가요?

    바울의 사상 어디에도 우릴 대신해서 지켜주신 율법의 의를 믿는자들에게 전가해주셨다는 그런 사상체계의 흔적조차 발견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건 온통 십자가의 피흘리심의 대속을 믿는 믿음의 의 뿐입니다.

    이쯤되다보니 대행의 의는 거짓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매우 혼란 스럽습니다.신고 | 삭제

    • 은혜 2019-03-17 16:54:56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려고 하는것도 설명되어서도 안된다. 하나님의 은혜는 보편적 일수도 있고
      선택된 은혜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유로우신 분이고 공의로운 분이시다.이 뜻을 인간이 이해 하는 범주에서 다 설명 할수 없다

      은혜란 우리가 받을만한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셔서 주시는 사랑과 자비로 정의한다면 하나님은 이은혜를 누구에게 베풀기를 약속하신 것인지 를 먼저 설명해야한다

      요한 웨슬리에 따르면, 죄로 인해 일그러진 하나님의 형상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 안에서 회복된 것이다. 칭의적 은혜 안에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인간적인 상황을 인정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식적인 결단을 하며, 제자의 삶을 구체화 하는 적절한 책임을 진다. 다시 말하자면, 이런 차원의 하나님의 "은혜는 바로 선물이다". 하나님의 은혜 만이 우리를 하나님과의 관계로 이끌어준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거나 사랑 받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께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렇게 행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믿음으로 응답하기만 하면 된다.신고 | 삭제

      • Minn 2019-03-17 16:08:46

        며칠 전에 어느 신학교 교수님께 이메일 답장을 받았습니다. 번역한 글이 서투르니 양해를 구합니다.
        제가 행위언약과 능동적 순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여쭤봤더니 답장이 왔습니다.

        네, 당신과 본질적으로 같은 생각입니다.
        나의 논문의 요점은 칼빈은 행위언약을 믿지 않을 뿐더러, 그렇게 하고 싶어도 그의 기독관 (또는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을 상당히 많이 고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공로를 쌓았다는 주장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유익을 왜곡시키는 것이고, 그분의 신성에서 인성을 추출해내므로,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나는 칼빈이 그리스도의 사역의 본질을 이해하는 아주 색다른 구조를 갖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그 전에 있었던 어떤 언약을 고치러 오셨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리스도 자체가 언약이라고 봤습니다. 이 말은 기독관(또는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이 언약을 위한 교의적 중심이지 그 반대가 아니란 것을 뜻합니다.

        신학적 표현들이 많아서 제대로 배우신 분들은 이해가 더 가실 듯 합니다.신고 | 삭제

        • 개념에 대해 2019-03-16 22:54:34

          카이퍼와 워필드 그리고 바빙크와 벌코프 모두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주장하고 언약사상을 강화시켰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성경에 기초해 세운 이론의 오류를 후배들이 성경으로 개혁해 줄 것으로 믿는 것이 개혁주의이며 개혁주의의 정신이다.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 이론의 성경적 오류가 발견되면 이를 교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뿐만 아니라 의무이다. 선배들의 명성이 성경을 앞서지 않기 때문이다.
          능동적 수동적 순종 논란은 종교개혁기, 1세대 청교도 때부터 장로파 회중파를 가리지 않고 논란이 되었다. 당시에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으로 순종을 구분하여 설명하려는 쪽과 수동적 순종에 모든 것을 담아내려는 쪽이 있었고 이들 모두는 주님의 신실한 성도들이었기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들 양쪽을 모두 통합하는 입장을 취했다.

          19세기 언약사상이 강화되고 개혁신학의 주류가 되면서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 이론이 다수의 이론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 이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 이론에 논란이 일고 있다. 사소하다고 할 수도 있는 논쟁이 커져서 능동적 순종 논란이 되어버린 것이다.
          알지 못하는 큰 섭리하심이 있을 수도 있다고 하는 생각마저도 들고 있다. 논란이 되고 있는, 능동적 순종 수동적 순종 이렇게 두 측면으로 구분된 순종과 구분되지 않는 하나의 순종에 대하여 요약하여 알아보자.

          능동적 순종은 수동적 순종과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며 예수님의 순종을 능동적 측면과 수동적 측면 이렇게 두 측면으로 구분하는데, 능동적 측면은 온 율법을 준수하시고 그 정점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측면이고 완전하신 율법준수를 통해 의를 획득하셨고 시간적이 아닌 논리적으로 믿음과 수동적 칭의에 선행한다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공의를 고려하지 않고 죄인을 사면하심이 아니고 인간과 화해 과정에서 율법을 배제하는 주관자가 아니시며 의로운 재판장으로 은혜로운 아버지로 나타나심을 보여주고 있고, 의의 전가는 우리를 아담의 상태로 회복하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를 의미하며 이를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대속을 가리키는 측면인 수동적 순종뿐만이 아니라 능동적 순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쉽게 표현하면 십자가 대속하심으로 우리의 죄가 없어진 수동적 측면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첫째 아담 대신 율법을 다 준수하시며 율법의 정점인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아담이 못 지킨 율법을 지키셨고 이것이 의가 되어 믿음으로 우리에게 전가되었다는 이론이다.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 두 측면으로 구분되지 않는 하나의 순종이론은, 창세 전에 정하신 하나님 뜻대로 순종하심으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시기 위해 성자하나님께서 비하하셔 성육신하시고 고난의 삶을 사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지옥에까지 낮아지셨는데, 한 의로운 행위로 인정받으신 하나님 뜻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심 이 자체가 의이며 율법의 요구 완성이며 속죄라는 이론이다.신고 | 삭제

          • 칼빈주의자 2019-03-16 11:58:32

            원죄의 핵심이 반역이라 구약학자 손석태 박사도 주장했는데 그 배경에는 칼빈이 있었네요. 제대로 칼빈의 원죄를 이해를 하셨네요.신고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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