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로 말미암는 준비』 2장 앞 부분 분석

오늘은 『은혜로 말미암는 준비』의 2장, “청교도 준비교리의 선례: 어거스틴에서 존 칼빈까지”의 전반부를 분석하려고 한다. 2장의 제목에서 비키가 주장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의 저술에서 청도교의 회심준비론의 선례를 찾을 수 있고, 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저술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이다. 어거스틴과 청교도 회심준비론의 관계에 대해 비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준비적 은혜에 대한 어거스틴의 견해가 청교도들의 견해와 전적으로 일치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 그보다 우리는 준비 과정에 대한 설명이 주권적 은혜라는 어거스틴 전통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조엘 비키, 63)

어거스틴은 종교개혁 교회들과 천주교회들이 함께 신앙의 조상으로 존경하는 특이한 인물이다. 어거스틴의 신학 속에 천주교의 뿌리가 되는 요소들과 종교개혁 교회들의 신앙의 근본이 되는 요소들이 함께 있다. 어거스틴의 나쁜 점들을 천주교가 가져갔고, 어거스틴의 좋은 점들을 종교개혁자들이 가져왔다고 생각하면 무방할 것 같다. 비키가 어거스틴의 저술에서 청교도 회심준비론의 선례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런 복잡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회심준비론 개념은 반펠라기안 신학에 부착된 로마교회의 ‘도움의 은총’ 개념 속에서 더 먼저 나타났다. 천주교는 도움의 은총이 임하여 사람이 하나님이 주실 구원의 은혜를 받을 준비를 한다고 지금도 가르친다. 이후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를 통해서도 명칭이 다른 회심준비론이 나타났다. 웨슬리는 천주교의 반펠라기안 신학과 매우 유사한 알미니안 신학이 성행하던 시대의 사람이고, 일평생 천주교 흔적을 많이 가지고 있는 영국 국교회의 사제였다. 

웨슬리는 일반은혜와 자유의지가 협동하여 회심을 위한 준비가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회개해야 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간이 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하면, 성령이 그를 중생시킨다고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칭의를 얻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쳤다. 중생을 얻은 후부터 자유의지가 일반은혜의 도움을 받아 성화되는 작업을 이루어 간다고 하였고, 성화가 완전 상태에 도달하면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하신다고 했다.

명칭이 다른 로마교회의 회심준비론과 청교도의 회심준비론의 차이는 무엇일까? 알미니안 신학과 영국 국교회 속의 로마교회 신학의 영향을 받았던 웨슬리의 명칭이 다른 회심준비 사상과 청교도의 회심준비론의 분명한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언제 인간에게 완전하고 영원한 칭의가 주어진다고 가르치는가? 에서 결정된다. 천주교에서는 오직 믿음이 아니라, 믿는 자의 선행에 근거하여 칭의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천주교에는 믿음으로 인한 완전한 칭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웨슬리도 믿음으로 완전한 칭의를 얻는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완전한 칭의는 성화가 완전해지는 것에 달려있다고 가르쳤다. 

회중파 청교도의 회심준비론은 인간이 언제 완전한 칭의를 얻는다고 가르칠까? 이 부분에서 필자는 한 가지 심각한 의문에 봉착했다. 지금까지 회중파 청교도들의 신학을 연구하면서 인간이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오직 그 믿음에 근거하여 완전한 칭의를 얻는다는 가르침을 본 적이 없다. 이점이 칼빈의 개혁신학과 회중파 청교도의 신학이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칼빈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선물)로서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그 믿음에 근거하여 완전한 칭의를 얻는다고 가르쳤다. 칼빈은 인간의 도덕성이나, 삶과 행위의 모습이 칭의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행위에 의해서는 바르다는 증거를 받을 수 없는 사람이 신앙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아, 그 의를 입고 하나님 앞에 나타날 때에는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의로운 사람으로서 나타날 때에는 신앙에 의하여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칭의를 간단히 설명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 주셔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이라고 한다. 또 칭의는 죄를 용서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기독교강요, 3.11.2)

청교도 회심준비론을 연구하면서 칼빈처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완전한 칭의를 얻는다는 주장을 보지 못했다. 전통적 회심준비론은 하나님의 은혜로 영혼이 깨어난 사람의 스스로의 노력으로 회심을 준비한다는 쪽으로 기울어졌고, 조엘 비키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은혜로 죄인이 회심을 향하여 준비되게 한다는 쪽으로 더 기울어지는 것 같다.

그러나 ‘준비’된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완전하고 영원한 칭의를 얻는다는 가르침을 보지는 못했다. 청교도 회심준비론이 그리스도는 믿을 때 완전한 칭의를 얻는다고 가르치지 않는다면, 명칭이 다른 천주교와 웨슬리의 준비론과 청교도 회심준비론의 차이는 없는 것이다. 사람이나 하나님, 둘중에 누군가의 주도로 구원을 위해 ‘준비’된다고 하는데,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완전한 칭의를 얻는다고 가르치지 않으면 성경과 개혁신학으로부터 벗어난 신학으로 판정되어야 마당하다. 과연 청교도 회심준비론은 구원을 위해 ‘준비’된 인간이 언제 완전한 칭의를 얻는다고 가르치는가?

필자는 비키의 『은혜로 말미암는 준비』의 2장을 읽으면서 많은 혼란스러움을 경험했다. 비키가 회심준비론을 어거스틴으로부터 기원을 찾을 수 있다고 논증하면서 필립 샤프, 리챠드 멀러, 토머스 아퀴나스의 말을 인용하였기 때문이다.

“필립 샤프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중략) 저항하는 의지를 극복하고 죄에 대한 실제적인 지식과 구원을 갈망하는 단계에서 은혜는 gratia praveniens or praeparans(선행하는 또는 준비시키는 은혜)이다. 믿음과 선을 행하고자 하는 자유 의지를 일으켜 영혼을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은혜 gratia operans(적용되는 또는 역사하는 은혜)이다. 남은 죄와 싸우는 자유 의지로 말미암는 믿음의 열매로서 선행을 낳게 하는 은혜는 gratia cooperans(협력하는 은혜)라 한다. 마지막으로 신자들이 끝까지 믿음을 보존하도록 하고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인도하여 비록 이 세상에서는 아닐지라도 더 이상 죄도 없고 죽음도 없는 상태에 도달하도록 하는 은혜는 gratia perficients(완벽한 은혜)이다.” (조엘 비키, 61)

이 내용을 보는 순간, “이게 과연 어느 계보에 속한 개혁신학자의 글인가?” 라는 의문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구원을 설명하는 개혁신학자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구원의 은혜를 이렇게 까지 자세하게(사변적으로) 분석하여 설명하는 것이 과연 필요할까? 너무나 불필요한 사변적인 신학이고, 어쩐지 천주교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거부할 수없다. 샤프가 어떤 학자인지 알아보았다. 그의 책들을 소개하는 인터넷 서점의 저자 소개란에서 심각한 내용을 발견하였다.

“성서신학자, 교회사가, 선구적인 세계교회 일치운동가 ... 그는 1844년에 미국 펜실베니아 주 머서즈버그에 있는 독일 개혁교회 신학교의 교회사 및 성서학 교수로 초빙을 받았다. 그는 취임 강의를 엮어 만든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원칙>(1844)에서 기독교 교회사를 프로테스탄트 신앙과 로마 가톨릭 신앙이 연합하여 새로운 복음주의적 가톨릭 신앙으로 나아가는 신적인 발전 과정으로 보았다. 이 강의로 이단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나 ... 1870년부터 죽을 때까지 뉴욕 유니온신학교 교수를 지냈다. 1866년부터 복음주의 연맹에서 일하는 가운데 기독교의 일치를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샤프는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치는 곳으로 명성이 자자한 유니온 신학교의 교수였고, 천주교를 성경적인 종교로 보고 기독교와 일치시키는 운동을 펼치다가 이단 시비까지 받은 종교통합 운동가였다. 꼭 이런 사람의 이론까지 동원해야 했을까? 비키는 칼빈의 정통 개혁신학과 회중파 청교도의 스콜라적 개혁신학이 방법에서만 다르고, 내용에서는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가장 대표적인 학자 리챠드 멀러(Richard A. Muller, 1948- )의 주장도 소개하였다.

 

“리챠드 멀러는 개혁주의 학자들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각각의 역사를 구분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각각의 역사는 다음과 같다.

1) Gratia praveniens, 즉 선행적 은혜로, 이것은 회개에 앞서 일어난다. 2) Gratia praeparans, 즉 준비적 은혜로, 자신의 무능력을 자각함으로써 그리스도께 나아갈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3) Gratia operans, 즉 적용적 은혜로, 이것은 영혼을 중생시키고 믿음을 일으킨다.

4) Gratia cooperans, 즉 협력적 은혜로, 이것은 중생한 영혼을 성화의 과정 동안 계속 복돋는다.

5) Gratia conservans, 즉 보존적 은혜로, 이것은 신자들이 끝까지 보존되도록 한다.” (조엘 비키, 64)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설명하는 리챠드 멀러의 주장도 필립 샤프의 말과 매우 비슷하다. 칼빈이나 다른 정통 개혁신학 계승자들의 글에서 발견되지 않는 구원의 은혜에 대한 극도의 사변적인 이론이다. 17세기의 사변적 개혁파 신학자들의 방식을 멀러가 극도로 두둔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자신도 이처럼 극도의 사변적 신학 방식에 철저하게 세뇌되어 있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17세기의 스콜라주의 개혁파 신학자들의 사변적 신학의 병폐를 현대의 개혁파 신학자가 이렇게 철저하게 답습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어쩐지 멀러의 신학의 분위기가 천주교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멀러는 미국의 칼빈신학교에서 오래 동안 교수한 사람인데, 칼빈신학교를 운영하는 CRC 교단의 분위기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된다. CRC 교단은 지난 2012년에 천주교와 세례협정문을 체결했다. CRC 교단과 로마교회가 상호간의 세례의 의미를 인정하고 공유한다는 약정을 맺었다. 필자도 당시 CRC 목사였는데, 그것을 보고 칼빈신학교를 운영하는 대표적인 개혁교단이 종교통합으로 가는 길목의 장애물 하나를 제거했다고 판단하고 CRC 교단에서 탈퇴하였다. 조엘 비키도 칼빈신학교에서 공부한 사람인데, 그래서 이런 분위기를 거부하지 않는 것일까?

혼란스러움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비키는 중세의 천주교 신학자 토머스 아퀴나스의 말까지 소개하면서 자신의 회심준비론을 옹호하였다.

“중세 신학자 토머스 아퀴나스(1225-1274) 또한 인간을 준비시키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은혜를 받도록 스스로 준비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준비적 은혜는 상존 은혜(habitual grace)가 주입됨과 동시에 시작하게 된다. 또는 준비적 은혜가 상존 은혜보다 앞서서 일어나고 단계적으로 상존 은혜로 이끈다.” (조엘 비키, 63)

비키가 청교도 회심준비론의 성경적 타당성을 논증하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에 인간이 반응하고 협력함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중세의 천주교 신학자의 이론까지 동원된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아퀴나스가 말하는 ‘상존 은혜’와 ‘준비적 은혜’(도움의 은총, 조력은총)에 대해 지금 천주교인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알아보았다.

“이 성화은총은 늘 우리 안에 주어져 성화 활동의 원천이 되며,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살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늘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고 해서 성화은총은 또한 ‘상존은총’(常存恩寵)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말로 풀어서 ‘늘 있는 은총,’ ‘언제나 은총’이라고도 하지요. 그래서 상존은총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살고 행동하고자 하는 지속적이고 초자연적인 변함없는 마음가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구체적 상황에서 어떤 일을 할 때에 예를 들어 회개를 하고 선행을 실천할 때에도 하느님의 도우심, 곧 하느님의 은총이 작용한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를 ‘도움의 은총’ 또는 ‘조력은총’(助力恩寵)이라고 부릅니다. 상존은총이 늘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은총인 것에 비해 도움의 은총은 우리가 행위를 하는 그 순간순간에 작용한다고 해서 ‘현행은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은총에도 종류가 있나요,” 가톨릭평화신문(2008.11.2))

천주교에서 ‘상존 은총’(은혜)는 구원 받을 준비가 다 이루어진 사람에게 세례(영세)를 행하여 원죄를 제거하고 성화되게 하는 순간부터 신자에게 역사하는 성령의 은혜이고, ‘준비적 은혜’(도움의 은총, 조력은총)는 구원과 다른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인간이 준비되고 반응하고 협력하게 만드는 성령의 역사이다.

필립 샤프와 밀챠드 멀러가 말하는 ‘선행적 은혜’, ‘준비적 은혜’는 아퀴나스와 현재의 천주교인들이 말하는 ‘준비적 은혜’, ‘도움의 은총’, ‘조력은총’과 같은 개념이다. 그리고 웨슬리가 주장하였던 ‘선행은혜’와 비슷한 개념이다. 비키의 청교도 회심준비론을 설명하는 글에서 왜 이런 내용이 나오는 것인가? 혼란스러움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더욱 더 놀라운 내용이 또 이어졌다. 비키가 2장의 어거스틴으로부터 청교도 회심준비론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고 논의하는 내용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준비론(preparation)이라는 표현을 펠라기우스주의나 율법주의 신학으로 추론하게 되면 교회가 말하고 있는 은혜를 인정하지 못하게 된다. 이에 반해 선행적 은혜에 대한 어거스틴의 견해는 수세기 후인 청교도 준비교리와 다소 유사점이 있다.” (조엘 비키, 64)

청교도 회심준비론을 천주교의 펠라기우스 신학과 율법주의 신학으로 접근하지 않고, 어거스틴이 인정한 ‘선행적 은혜’(준비적 은혜)로 접근하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것이다. 대체 어거스틴이 언제 구원받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선행적 은혜’가 온다고 가르쳤다는 것일까?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살펴보았다. 비키는 어거스틴이 <고백록>에서 자신의 구원의 과정을 돌아보면서 쓴 부분을 ‘어거스틴이 인정한 선행적 은혜’(준비적 은혜)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비키는 어거스틴이 <고백록>에서 로마서 13:13-14절을 읽으면서 체험한 마음의 변화를 설명하는 내용이 구원을 준비시키는 하나님의 선행적 은혜의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주님께서 내 영혼을 감화시켜 주셔서 주님을 영접할 준비를 시켜 주시길 갈망하며, 내 영혼이 주님을 간절하게 부르짖습니다.” (어거스틴, <고백록>, 13.1, 조엘 비키, 61)

어거스틴이 <고백록>에 나오는 이 내용, 즉 어거스틴에게서 일어난 영적인 변화가 구원받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부어주신 선행적 은혜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비키는 자신의 이 주장을 보강하기 위해 필립 샤프, 토머스 아퀴나스, 리챠드 멀러 등의 주장을 추가하였던 것이다. 필자는 어거스틴의 이야기를 회심을 위해 준비시키는 하나님의 선행적 은혜(준비적 은혜)라는 비키의 주장에 타당성이 전혀 없다고 확신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어거스틴이 <고백록>에서 기술한 내용, 즉 로마서 13:13-14절을 읽으면서 경험한 영적 변화를 어거스틴의 영혼이 성령으로 중생하기 전의 상태라고 단정하는 것은 사변적인 신앙사고의 형태이다. 오히려 어거스틴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보아야 맞다. 성령이 그의 영혼을 이미 중생시켰으므로 그의 사고와 지성 안에서 그런 변화가 일어난 것이라고 이해하여야 한다. 어거스틴의 영혼 속에 이미 새로운 생명이 들어갔기 때문에 나타나는 변화였다고 보아야 한다.

어거스틴이 그때 ‘그리스도 안에서의 쉼’을 느꼈다는 것은 이미 그의 영혼에 하나님의 생기가 임하여 새로운 생명의 성장이 진행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리고 이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인정하는 ‘믿음고백’이 의지적으로, 지성적으로, 인격적으로 완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주님께서 내 영혼을 감화시켜 주셔서 주님을 영접할 준비를 시켜 주시길 갈망하며, 내 영혼이 주님을 간절하게 부르짖습니다.”

어거스틴의 이 말을 구원을 위해 선행적인 은혜로 준비된 후 드디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중생의 은혜를 얻었다고 이해하면 안 된다. 구원을 위해 준비되어 진 후 세례를 받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보는 것은 천주교의 신학 안에서 구원을 설명하는 방식, 즉 천주교의 회심준비론이다. 비키는 어거스틴의 이야기를 구원을 준비시키는 하나님의 ‘선행하는’, 또는 ‘준비시키는’ 은혜라고 무리하게 규격화하였다.

비키가 범한 잘못을 쉽게 설명하자면, 정자와 난자가 결합 순간을 새로운 생명이 탄생이라고 보지 않고, 시간이 지나 심장이 박동하고 발길질하는 정도로 성장해야만 생명의 탄생으로 인정하는 것과 같은 유형의 오류이다. 비키는 무리하게 어거스틴에게서 구원에 이르도록 ‘준비시키는 은혜’ 를 추출하였고, 또한 천주교의 구원론을 그대로 자신의 이론에 도입하였다. 종교일치 운동하다가 이단 시비에 오른 필립 샤프, 천주교의 스콜라신학의 대표 아퀴나스, 천주교의 구원론을 그대로 인정하는 리챠드 멀러의 사상까지 그대로 도입하여 자신의 회심준비론을 기술하였다.

그리고 어거스틴이 중생한 신자를 염두라고 한 말이지, 아직 중생하지 못한 사람을 생각하고 한 말인지를 분명하게 규명하지 않으면서 어거스틴의 다음의 말을 통하여 청교도 회심준비론의 율법론을 주장했다.

“어거스틴은 ‘죄인은 율법의 기능을 합당하게 사용하고 적용시켜 자신의 불의에 대한 경각심을 가짐으로 ... 의롭다하심을 얻는 은혜로 향하는 피난처로 믿음 안에서 달려갈 수 있다.’고 말했다.” (조엘 비키, 62)

과연 어거스틴은 그리스도를 전혀 알지 못하는 불신자가 구약의 율법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경각심을 가지게 되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를 믿는 길을 선택한다고 가르쳤을까? 만일 어거스틴이 그랬다면, 필자는 오늘부터 어거스틴을 달리 볼 것이다. 비록 어거스틴이라고 해도 그리 가르쳤다면, 옳지 못했기 때문이다. 율법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여 자신의 부족함과 불의를 파악하고 경감심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이미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칼빈이 강조한 율법의 제3의 용도이다.
 

“하나님의 종이 율법에서 받는 혜택은 이 방면에도 있다. 즉, 율법에 대해서 자주 명상함으로써 복종하겠다는 열성을 얻으며 복종하는 힘을 얻으며 범죄의 미끄러운 길에 들지 않게 된다. 성도는 이와 같이 전진을 계속해야 한다. 그들은 성령에 따라 하나님의 의를 향해서 아무리 정성껏 노력하더라도, 무관심한 육이 짐이 되어 제대로 전진할 수 없다. 율법은 육에 대해서 마치 가지 않는 게으른 나귀를 가게 하는 채찍과 같다. 영적인 사람이라도 육의 짐을 벗지 못하고 있는 동안은, 율법이 여전히 끊임없이 자극이 되어 일시도 한 자리에 서 있지 못하게 한다.

확실히 다윗은 율법을 찬양했을 때에 이 용도에 대해 언급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생케 하고 ...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시 19:7-8). 마찬가지로.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이 밖에도 같은 시편에 유사한 말씀이 무수히 많이 있다(예컨대, 시 119:5).” (기독교강요, 2.7.12)

만일 율법을 불신자에게 가르치고 강조함으로 자신의 불의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역사가 천년에 단 한번만이라도 벌어진다면, 나는 나의 입을 막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을 일어나지 않는다.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인간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였다는 성경의 말씀은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가 나타나시기까지의 과정, 즉 구속사에서 그리스도의 강생보다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율법이 먼저 역사 속으로 도입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의 강생 이후에도 인간에게 먼저 율법을 전하여 죄를 깨닫고 겸비하게 만들어야 그 사람에게 그리스도가 들어갈 영적인 자리가 확보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리해서 구원에 이르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나오면 내가 스스로 나의 입을 막을 것이다.

정통 개혁신학자 서철원 박사도 율법은 이미 믿는 자에게 선포되어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만든다고 가르친다. 결코 불신자에게 율법을 선포하여 불신자가 그리스도를 향한 회심을 위해 준비되게 만든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루터와 루터교회는 율법이 사람으로 회개에 이르게 한다고 주장한다. 율법을 선포하면 회개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완고해져서 회개하지 않고 변명만 찾는다. 회개는 율법선포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복음선포로 이루어진다 ... 그러므로 율법은 은혜의 방편으로 설교하는 것이 아니다. 죄가 무엇이며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선포한다. 율법을 선포 받아서는 결코 회개에 이르지 않는다. 실제로는 율법을 선포 받아 죄를 아는 것이 아니다. 복음을 선포 받으므로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고 믿게 된다.

사람으로 회개하게 하려면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복음을 선포하므로 자기가 하나님 앞에 큰 죄인인 줄을 깨닫고 회개하여 믿고 의에 이른다 (롬 4:13-16). 율법은 이미 믿는 자들에게 죄를 알게 하고 피하게 하기 위해서 선포된다 ...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인의 생활규범으로 선포해야 한다. 즉 그렇게 육의 욕망을 따라가면 범죄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율법을 가르치고 선포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율법으로 사람을 고치려고 책망하고 꾸짖으면 고쳐지는 것이 아니라 반발과 반감만 갖는다. 율법을 가르치고 전파해서는 결코 죄짓는 것을 막을 수도 없고 행실을 고칠 수도 없다.” (서철원, 교의신학전집 6: 교회론, 97-99)

 

맺는 말

어거스틴과 천주교 신학을 통하여 청교도 회심준비론의 정당성을 얻으려는 비키의 시도는 매우 부당하고 엉성하다. (다음에는 2장의 후반부, 비키가 청교도 회심준비론의 선례를 칼빈의 저술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부분을 분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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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