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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준비론은 기독교 신정국 교회들이나 시도했던 것이다

기사승인 2019.05.25  09:4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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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청년시절 20대말, 사랑의 교회에서 나온 제자훈련 교재를 가지고 공부할 때에 구원의 확신을 전적으로 수긍 했습니다. 그 때에는 구원파처럼 내가 구원받은 날짜와 시간까지 적어내곤 했었죠. 1990년도 초에는 그만큼 구원파의 영향이 기존 교회에 까지 미쳤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연구하고, 특히 종말론을 연구하고, 이단에 대해 공부한 결과 그것이 잘못됨을 알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구원의 확신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또한 구원을 주관적으로 체험하는 것, 즉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지, 정, 의 3 요소 중 감성(체험)에 속하는 부분입니다.

기독교는 신비를 포함하기에 신비와 체험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내가 구원의 확신을 갖는다고 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그렇지 못하다고 해서 구원을 못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주시며 구원 베풀 자를 반드시 구원해 주십니다.

그 당시(1990년대 초) 제자훈련 중 구원의 확신을 ‘강요’당하곤 했습니다.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까?”라고 구원파처럼 질문할 때, 머뭇거리면 지도자가 “당신은 구원의 확신이 없으니 구원을 못 받은 것이야! 그러니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해!”라고 말했곤 했습니다. 과연 그것이 옳은 일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영역이고 주권인데 그러한 질문을 피조물인 인간이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성도들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예수를 믿습니까?”

이렇게 질문할 수는 있습니다. 거기에 대한 답으로 “예”하고 답할 수는 있습니다. 믿음은 인간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1500년대 초 루터는 “죄인인 인간이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설 것인가?”라는 심판에 대한 의식이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목사들이 믿고 있는 칭의론은 ‘전통적 칭의론’으로 루터파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에 의해 기여된, 심판이 제외된 칭의론 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심판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분법적 비유들 (알곡과 가라지, 양과 염소, 마 7장에 나오는 구원을 확신 하였던 거짓 교사들, etc)도 그것을 증명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임종시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우리의 믿음과 칭의가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과 칭의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결 받는 것입니다. 그때 유보된 칭의가 주어지거나, 또 다른 종말적 칭의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를 믿고 받았던 칭의의 진위가 가려진다는 말입니다. 알곡과 가라지, 양과 염소처럼 말이지요.

사도 바울도 그 당시 그를 거짓 사도로 판단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판단 받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며, 그 자신이 신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깨달았을지라도 그 자신을 의롭게 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고 합니다(고전 4:3-5).

칼빈도 이 세상에서 ‘누가 택자인가?’를 아는 것은 불가능함을 강조하였습니다. 칼빈도 주님 앞에 섰을 때, 택자 인지의 여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더 나아가 ‘구원 얻는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 ‘회심준비론’을 설정 하였습니다. 즉 ‘회심준비론’을 통해서 가견교회로 부터 알곡(택자)을 추리는 작업을 했던 것입니다. 택자를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이신데, 인간이 ‘누가 택자인가 평가하는 것’은 한마디로 비성경적입니다.

그 당시 영국 국교회로부터 핍박을 받았던 분리파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와 더 낳은 경제적 삶을 위해 신대륙으로 이주하여, Virginia에서는 성공회를 중심으로, New England에서는 회중파를 중심으로 일종의 신정정치를 실현했습니다. 여러 가지 신학적 도전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회심준비론’을 설정해 그들의 교회원의 자격을 높였으며 시민들 또한 그들의 지침에 절대 순종하였습니다.

그 당시 정부와 교회는 유착관계가 있었기에 교회원이 되는 것과 그들의 생존권은 긴밀한 연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Jonathan Edwards의 1 차 대각성 운동을 기점으로 새로운 이주민들이 몰려오고, 각종 종교 형태가 유입되고, 종교에 관심 없는 젊은 세대들이 늘어감에 따라 청교도 정신과 그 공동체는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계몽주의적 사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미국이 건국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들은 초기 청교도 신앙과 거리가 먼 이신론(자연신론)자 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고, 성육신 한 예수 그리스도, 동정녀 마리아 에게 탄생하심을 부인하며,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지 않았던 비 기독인들 이었습니다.

현 시대에 있어서 그러한 ‘회심준비론’을 구현하는 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첫째로 교회 지도자들의 영적부재 현상으로 지적으로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교회원들을 지도할 인물이 없습니다. 또한 정부와 교회가 분리된 다원화 된 포스트모던 시대에 교회원의 자격을 높여 교회의 문턱을 높인다면 누가 교회에 관심을 갖겠습니까? ‘너나 잘 해봐!’라고 할것이 아닙니까?

마지막으로 이 시대에는 신자나 예비 신자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신앙에 관심이 없다는 점입니다. ‘회심준비론’의 적용 가능성은 이 시대에는 매우 희박합니다. 그러나 ‘회심준비론’이 성화의 과정으로 적용된다면 그것은 수용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회심준비론’과 성화의 과정 즉 성령으로 인도되는 삶은 어느 정도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 것이지 믿음과 행위, 혹은 구원의 확신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구원 받는다” 혹은 “우리 믿음의 기초가 구원의 확신이어야 한다”는 논리는 구원파 신학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성령 받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 이라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소리에 우리는 민감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성령(은사)운동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성령을 통해 방언, 예언, 환상, 계시가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바른믿음>을 통해 이미 충분하게 논의 되었습니다. 성령님은 자기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시고,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시고,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우리가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즉 속죄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면 우리의 선행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그리스도를 나타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선행이란 종교적 행위나 종교적 의무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죽이고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모든 행위를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

김리훈 samuel227600@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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