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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나님께 죄 용서를 구해야 하는가?

기사승인 2018.04.18  11: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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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막 6:9-13)
 

왜(Why) 용서를 구해야 하는가?

1) 죄를 용서하여 달라는 기도는 모든 기도의 출발이고 신앙생활 성화의 기초이고, 일용할 양식(Daily Bread)을 매일 구하듯 일용할 용서(Daily Forgiveness)도 매일 구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죄라는 단어는 이미 지적 한대로 마태는 "빚", "부채", 누가는 "빗나가다"라고 하는 용어를 사용했다.

다섯째 청원을 원문의 뜻을 다치지 않고 연결시켜 보면, "날마다 죄(빚진 자)를 오늘 탕감하여 주신 것같이 날마다 우리의 죄(빚)도 탕감 하여 주옵소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육신의 떡의 갈급한 필요를 날마다 가지고 사는 것처럼 내 영혼에 하나님의 용서가 날마다 실현되도록 살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많은 빵의 필요를 얻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용서를 날마다 받아야 한다. 알렉산더 맥글라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빵이 필요하게 만들었고 우리는 우리 자신들로 하여금 날마다 용서를 필요로 하게 만들었다"

2) 죄의 용서는 적은 것에서부터 아무리 큰 죄라도 범죄의 내용에 관계없이 용서의 범위 안에 두셔서 용서해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죄과를 멀리 옮기셨고 (시 103 : 12),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과 같이 되리라"(사 1 : 18)라고 하셨다.「주홍색」은 헬라어에서「두 번 담갔다」는 뜻이 있어서 인간의 기술로는 그 물감을 다시 씻어낼 수 없는 것을 상징한다.

비록 우리의 죄가 주홍색 물감을 들인 것 같을지라도 하나님은 용서 하시고 죄를 씻어 주신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 나오는 임금은 그에게 일만 달란트 빚진 그의 채무자를 용서해 주었다(마 18 : 27). 한 달란트는 삼천 세겔의 중량이며, 일만 달란트는 거의 십이톤의 금을 함유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들을 구름처럼 흘어지게 하시고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 하였으니"(사 44 : 22)라고 하셨다. 죄를 용서하심의 크기와 내용에 관여 하지 않으시므로 우리가 완전히 용서를 받을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3)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뿌리는 하나님의 용서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았고(롬 1 : 17),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으며(롬 5 : 8),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 : 1), 우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 : 39)는 확증과 함께 용서해 주시는 그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롬 8 : 15)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4) 그리스도인의 용서를 구하는 삶은 자신이 사죄의 축복을 날마다 더 깊이 체험하므로 평안과 희락을 누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용서 받지 못한 죄인은 마음속에 두근거리는 떨림을 가지고 살아간다. 천둥소리에도 놀라고, 풀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에도 놀라며, 두려움과 고통과 슬픔으로 살아간다. 요한 사도는 "두려움에는 형벌이 따름이라"(요일 4 : 18)고 하였다. 형벌(Torment)이라는 헬라어 용어 콜라시스(κολασις)는 때때로 지옥(Hell)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두려움은 그 속에 지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빚을 지고 있는 사람은 부채를 해결하지 못해 발걸음마다 체포당할까 두려워하고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 이처럼 용서받지 못한 죄인은 오늘밤 죽음이 찾아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있다. 그러나 용서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사죄의 깊은 은총과 함께 날마다 기쁨으로 살아간다.

5) 그리스도인이 용서를 하지 않고 계속 저주하는 생활을 할 때 자신의 건강과 생활에 손해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는 "저가 저주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 아니하더니 복이 저를 멀리 떠났으며 또 저주를 옷 입듯 하더니 저주가 물같이 그 내부에 들어가며 기름 같이 그 뼈에 들어 갔나 이다"(시 109 : 17-18)라고 저주를 금하지 않는 댓가에 대해서 고백 했다. 용서는 저주라는 질병을 치료하는 건강제이다. 상대방을 용서하지 못하고 증오할 때 제일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다.

용서 할 수 없는 상대방을 축복하고 용서를 먼저 구할 때 영육간에 강건한 삶을 살 수 있다.(요한 3:2),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 12:14),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나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9),"마지막 때가 이를수록 사람들은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딤후 3:3)라고 했다.

용서는 곧 원통함과 저주스러움을 풀어야 하는 것이다. 마음에 한이 맺혀 있는 사람은 잠도 제대로 못 이루고 평안을 빼앗기고, 그것이 병이 되어 건강을 잃고 만다. 용서를 통해 맺혔던 모든 것을 푸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영혼의 치유는 사죄(용서)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진다.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용서는 내 자신의 건강을 지키는 것이고, 용서에 이른 후에야 건강한 인간관계가 가능해진다.

6) 용서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 계명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 사도는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 할 수가 없느니라"(요일 4:20)라고 했다. 사랑은 용서라는 나무에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7) 도무지 용서 할 수 없는 대상 일지라도 우리는 반드시 용서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사람들과 같다. 그러므로 백 데나리온 빚 진 사람을 반드시 용서해야 한다.

 

김석원 cccj2k@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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