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정이철 목사는 왜 성경에 나오는 방언을 부정하는고? 그러고도 살 것 같은가? 고전 14:2절은 왜 보지 않으시는기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방언으로 비밀을 말한다고 성경에 나왔는데, 당신은 왜 성경과 성령을 부정하는기요?답변>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방언을 실제로 시연하는 미국의 한 이단 교회의 어린이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대표적인 신사도 이단이 세운 교회의 어린이입니다. 대체 무슨 비밀을 하나님께 말하고 있는지 보십시오. 방언으로
오늘은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의 은사에 대한 본문을 읽었다. 역시 우리를 혼동에 빠지게 하는 난해한 구절들이 많고, 그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1>“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전 14:2)이 구절은 표면적으로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께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으면서 기도하는 것이 방언의 은사라고 가르치는 것 같다. 그러나 모순되는 내용이 이 속에 들어있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자”라고 하지 않고 “방언을 말하는 자”라고 하였다. 성경적으
질문>정이철 목사님, 오륜교회의 최근의 금요기도회 실황을 담은 영상의 마지막 부분을 잘라서 보냈습니다. 집회가 끝나갈 무렵에 김은호 목사가 무대에 등장하여 집회를 마무리하는 모습입니다. 김은호 목사가 신자들에게 통성기도를 하게 한 후 자신도 기도를 하는데, 김은호 목사의 신비한 빙언기도가 마이크를 통해 청중들에게 들려지고, 녹화되었습니다.김은호 목사도 소위 ‘방언기도’라고 하는 신비한 기도를 하시는 분인 것 같습니다. 잘 들어보시고, 김은호 목사에게서 나오는 짧은 내용이 이상한 소리가 방언기도가 맞는지 보십시오. 그리고 그런 기도가 성경의 어디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는지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답변>잘 들어보았습니다. 찬양팀의 노래소리와 신자들의 통성기도 소리에 묻혀서
질문>정이철 목사님!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방언은 초대교회에서 나타났던 것과 같이 각각 다른 나라의 언어로 했던 것 이외에 방언은 있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그러나 실제로 교회 안을 들여다보면 온갖 방언을 하는 사람들을 어렵잖게 볼 수있습니다. 사실 그렇게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 외에 그 교인들의 신앙과 삶은 교회 안의 다른 교인들과 별반 다른 모습은 없습니다. 특별히 다른 점이 없으면서 방언 기도하는 성도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어리석은 기도를 하는 자들인가요? 어떤 분은 방언을 하는 자는 귀신들린 자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성경에 근거하여 답을 듣기 목마릅니다. 목사님의 지혜의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답변>제가 아는 착한 신자들 가운데 방언으로
질문>미국에서 사역하시는 정이철 목사님, 정말 방언은 귀신이 준 은사인가요? 왜 방언이 귀신이 준 은사인지 다시 말해 보실레요. 저는 기도하다가 방언을 받았는데, 그러면 저는 귀신을 모시고 사는 사람인가요? 답변>사람들이 저에게 끈질기게 방언은사에 대해 질문하면서 불만을 터뜨리시네요. 한 번 더 방언에 대한 저의 신학적인 입장을 설명합니다. 저는 방언을 귀신이 주었느니, 산신령이 주었느니 ... 그런 말을 하지도 않고, 한 적도 없습니다. 단지 저의 주장의 핵심은 “성경의 방언은 기도의 은사가 아니다”입니다.성경 어디에도 방언이 기도의 은사라는 명확한 말씀이 없습니다. 성경의 인물들 중에서 그 누구도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말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이철 목사님,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서 신앙생활하는 성도입니다. 우연찮게 유투브를 통해 목사님의 방언에 대한 강의를 듣고 의문이 있어서 메일을 보내니 답변을 바랍니다.질문1>고린도 전서에 나오는 방언이 외국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이 방언이 많이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했다고 하는 구절을 바울이 다른 여러 나라 언어를 구사했기 때문이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성령의 은사로써의 방언은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바울이 초자연적으로 다른 나라 언어를 구사한 것 아니라 학습에 의해서 했을텐데, 우리가 흔히 영어 공부 열심히 해서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면 그것을 보고 방언의 은사라고 하지 않지 않나요?답변>성경의 방언은 하나님의 직통의 설교였고, 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설명이었고,
오늘 어떤 분에게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메일이 왔다. "방언이 악령의 역사라면, 목회에서 방언기도로 귀신에 잡힌 자매 등에게 질병 치유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설명이 안 됩니다. 바알세불 귀신의 왕이 귀신을 쫒아 낸 것인가요? 귀신이 거품을 흘리며 떠나감은 무엇인가요? 목회 40년 동안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자신의 경험적 방언기도 한 번도 없이 방언에 대한 이론적 부정은 무지의 소치입니다. 경험하고 있는 중에 본인이 그 방언을 학문적, 셩경적, 교회사적으로 비판한다면 이해되지만, 한 번도 경험없이 비판하는 것은 본질적 해프닝입니다. 저는 방언기도와 함께 거듭남을 전인적으로 경험했고, 내 인격과 삶과 구원이 완전히 하나님께로 전환되었습니다. 그리고 40년 동안 목회하고 있습니다. 방언기
오순절주의의 방언 통역이 성령의 은사가 아닌 이유통역은 양자 모두가 서로의 언어를 모를 때, 양자의 의사소통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만약 어느 한 편이 양자의 언어를 모두 알고 있다면, 소통 가능한 언어를 쓰면 되므로 통역은 따로 필요 없다. 그래서 앞 장에서 예로 든, 말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예배하는 현장에서, 조용기 목사의 방언-통역은 그가 꾸며낸 종교 해프닝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양자 모두가 서로의 언어를 모를 때 통역이 필요한 법인데,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언어를 다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계시를 주실 때 회중이 아는 언어로 은사자에게 말하게 하실 것이다. 이 은사가 바로 예언의 은사다. 물론 고린도 교회의 예배 현장에서는 예언뿐 아니라 방언도 있었다. 이때 누군가가 방언을
들어가며오순절주의의 방언은 고린도교회의 방언과 맥을 같이 하는 거짓 방언이다. 이 거짓 방언은 소통이 불가능한 그저 꽹과리 같은 소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오순절주의의 거짓 방언은 당연히 통역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오순절주의의 거짓 방언을 통역한다면, 그 통역 역시 가증스러운 거짓 통역일 것이다.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순절주의자들에게는 통역이 가장 난처한 문제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통역에서 거짓이 들통나버리면, 그 동안 거짓 방언을 성령의 은사로 둔갑시킨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오순절주의자들 중에는 방언에 대해 말하는 자들은 많은데, 통역에 대해 말하는 자들은 소수에 불과하다(오순절주의자들의 세계에서는 통역을 해야 진정한 고수로 인정받는다).그
방언기도는 강한 중독성이 있다피방언자(방언의 은사를 받으려고 하는 자)가 처음 방언을 했을 때, 방언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황홀경을 경험하게 된다. 이 황홀경이 피방언자가 방언에 중독되는 일차적인 원인이 되는데, 처음 방언을 했을 때 피방언자가 경험하는 황홀경의 자극이 강하면 강할수록 방언에 중독될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 왜냐하면 피방언자의 뇌는 자극이 강하면 강할수록 강한 그 자극으로 인한 황홀경을 더욱 또렷하게 기억하기 때문이다.인간의 뇌가 황홀경을 기억하는 이유는 황홀경에 빠졌을 때 뇌에서 ‘도파민’이라고 하는 호르몬이 분비되기 때문이다. 도파민은 자극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많이 분비되는데 도파민이 분비되면 될수록 황홀경의 쾌감은 더욱 커진다. 그래서 도파민의 분비를
성경은 분명히 방언이 그치게 될 것을 교훈하고 있다. 바울은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13:8)라고 교훈했다. 특별히 “폐하고”, “그치고”, “폐하리라”는 표현들은 헬라어 원어에서 미래 수동태복수형( καταργηθησονται), 미래중간태복수(παυσονται), 미래수동태단수형(καταργηθησεται )으로 쓰였다.따라서 성경이 완성되면 예언과 지식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그치게 되고, 특별히 방언 같은 경우에는 주어의 역할을 강조하는 중간태로 쓰임으로서 성경의 완성과 함께 스스로 없어지게 될 것을 시사했다. 그러면 언제 없어지는 것일까? 고전 13장 9,10절을 보면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
이 밖에도 오순절주의자들이 말하는 방언의 능력과 유익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들 중 일반적이면서도 대단히 위험한 것들 몇 가지만 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첫째, 방언으로 기도하면 놀라운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어떤 오순절주의자는 방언기도를 하다가 공중으로 부양하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렇게 기도하다가 하늘로 올라가 버리면 우리 사모가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하고 인간적인 걱정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방언-저자 삽입)기도를 중단했습니다.”1) 그러면 바울은 방언기도를 열심히 하다가 삼층 천까지 올라간 것일까? 아무튼 이 정도면 병원에 입원해야 할 수준인 것 같다.2)손기철 장로는 귀신은 방언기도를 가장 무서워한다고까지 말한다. 그는 어느
오순절주의자들의 변태적인 ‘방언기도’가 거짓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첫째, 오순절주의자들의 방언은 외국어로서의 방언이 아니라 메시지가 없는 영음(잡음)이다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은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서나 고린도 교회에서나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인간의 언어다. 그러나 오순절주의자들의 방언은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음(잡음) 방언이다. 그러므로 오순절주의자들의 영음(잡음) 방언은 성령이 초대 교회에 주셨던 방언의 은사와는 다른 것이다.고린도전서 12장 10절의 은사 목록에 방언의 은사와 함께 통역의 은사가 있다는 것은, 방언이 외국인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는 언어라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1)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 14장 27절에서 방언을 말하고 그
오순절주의자들의 방언은 외국어가 아닌 영음 방언이다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은 배우지 않은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며, 다른 종류의 방언(영음, 하늘 언어)은 없다. 성령이 오순절 날 제자들에게 주신 방언도 언어였고, 고린도교회에 주신 방언도 언어였다. 그리고 1901년 로버트 파함이 운영했던 벧엘 신학교의 오즈만 여학생이 한 방언도 언어(중국어)였다고 한다.1) 로버트 파함은 그의 제자 아그네스 오즈만의 중국어 방언을 보고 방언이 외국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는 방언의 은사가 상시적인 능력으로 착각하여 언어 훈련 없이 선교사를 선교지에 파송해도 된다고 가르쳤고, 그의 가르침을 따랐던 선교사들은 안타깝게도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그런데 오즈만의 방언이 중국어가 사실이었다면, 성령이 오즈만에
성령의 은사는 초자연적이며 신적인 능력이다성령의 은사는 초자연적인 능력이다. 오순절 날 방언으로 말했던 제자들은 외국어를 배운 적이 전혀 없다. 그럼에도 성령이 임하셨을 때 이들은 배우지도 않은 외국어를 갑자기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이것은 제자들이 전혀 알지 못했던 외국어를 아무런 배움이나 훈련 없이도 구사할 수 있도록 성령이 이들에게 초자연적인 외국어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오늘날 선교사들이 선교지의 언어를 배워서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은사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초대 교회의 방언의 은사처럼 초자연적이거나 신적인 능력은 아니다. 단지 인간의 노력으로 얻은 외국어 능력일 뿐이다.또 성령의 은사는 신적인 능력이다. 이 능력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글을 열며지금까지 살펴 본대로,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문제 삼은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성령의 은사를 흉내 낸 거짓 방언임이 드러났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4장 2, 4절 등에 뿌리를 두고 있는 현대 교회의 방언도 당연히 거짓 방언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사실은 방언기도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는 생각을 꿈에도 해 보지 않았을 오순절주의자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일 것이다. 특히 방언기도를 통해 여러 가지 영적 체험(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이 체험은 영적 체험이 아니라 착각에 불과하다)을 한 사람들은 더욱 그럴 것이다.필자도 그랬다. 필자는 방언기도를 시작한 이래 수십 년 동안 방언기도가 주는 생생한 영적 체험들이 성령의 역사임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어느 날 성경을 통해 방언기도가 거짓
최종 경고바울은 지금(고전12장~고전14:32)까지의 가르침을 마무리하면서 고린도 교회에 최종적으로 엄한 경고를 한다."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고전14:37-38).위 본문에서 바울이 굳이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줄 알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말은 정상적인 신자들에게는 하지 않아도 되는 상식적인 말인데도 말이다. 그런데 바울의 이 말을 고려하면, 고린도 교회에는 자신을 신령하다고 여기는 정신 나간 자들이 많았던 것 같다.1)따라서 바울은 자신을 신령하다고 여기는 정신 나간 자들의 저항을 의식했기 때문에 자신이
바울은 성령의 은사가 소멸되어 갈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바울은 성령의 은사가 결국에는 소멸될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물론 바울이 성령의 영감으로 고린도전서 13장 10-11절을 기록할 때 확실히 깨달았을 테지만, 그 전에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은사가 소멸되는 것을 이미 인지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신유의 은사에 대한 그의 경험을 살펴보면 바울은 은사가 소멸되어 감을 몸소 겪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바울은 나면서부터 걸어본 적이 없는 자를 일으켰다(행14:10). 귀신들린 소녀에게서 귀신도 쫓아냈다(행16:18). 자신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통해서도 병이 떠나고 악귀가 나갔다(행19:12). 심지어는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까지 행했다(행20:10). 이렇게 바울
성령의 은사는 어떤 방식으로 소멸될까?오순절주의자들은 종말의 때가 가까이 올수록 사단의 역사는 더욱 강력해 질 것이므로 성령도 현대 교회에 성령의 은사를 더욱 많이 부어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듯 한 이야기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늘날 교회에 방언의 은사, 신유의 은사, 예언의 은사 등 성령의 은사가 홍수처럼 넘쳐나는 것이 말세에 성령이 교회에 은사를 부어주시기 때문이라는 방옹자들의 말을 아무 의심 없이 믿어버린다. 정말 그럴까? 종말이 다가올수록 성령의 은사가 교회에 더욱 넘쳐날까?만약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는 성령의 은사들로 가득 채워져 있어야 당연하지 않을까? 그러나 요한계시록에는 성령의 은사는커녕 은사에 대한 암시조차도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종말의 때에 성령은 교회에 하늘
들어가는 말성령의 은사는 중지되었는가? 아니면, 지금도 왕성하게 계속되고 있는가? 또 이것도 아니라면, 계속 소멸되고 있는가? 이 문제를 명확히 규명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현대교회에서 거의 합법적으로 무분별하게 난무하고 있는 방언기도의 거짓 여부를 가려낼 수 있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도 이 문제가 규명되지 않은 채 논쟁을 계속하고 있는 이유는 이 부분에 대해 바울이 명확하게 말하고 있는 고전13:10-13을 바르게 해석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은사 중지론자들은 고전13:10(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에서 “온전한 것”을 정경의 완성으로 해석함으로써, 성령의 은사는 이미 중단되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오순절주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