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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즈의 하나님 체험과 청교도들의 관상기도 신비주의

기사승인 2018.12.11  03:3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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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교도들의 관상기도를 연구한 탐 쉬안다(Tom Schwanda) 박사


에드워즈가 칼빈주의 신학을 구축하여 알미니안주의가 발흥하는 것을 늦추었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다. 에드워즈의 일생은 종교개혁 신학과 칼빈주의 신앙을 수호하는데 헌신한 삶이었다. 그는 자신의 대표작「의지의 자유」(the Freedom of the Will, 1754)에서 종교개혁 신학과 칼빈주의 사상의 가장 무서운 적인 알미니안 신학의 핵심을 정 조준하였다. 아담의 반역죄의 영향 아래 태어나는 인간에게 자신의 구원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의지의 자유란 존재하지 않음을 강력하게 논증했다. 에드워즈는 다음의 성경 말씀을 의지하여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택하심과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에드워즈는 또 다른 대표작「원죄론」(Original Sin, 1758)으로 대서양을 건너오는 영국 국교회의 알미니안 신학의 그릇된 원죄 사상으로부터 뉴잉글랜드의 칼빈주의 교회들 보호하였다. 영국의 존 테일러(John Taylor)가 쓴 책 「성경적 원죄에 대한 자유롭고 솔직한 조사」(the Scripture-Doctrine of Original Sin Proposed to Free and Candid Examination, 1740)가 많은 영국과 뉴잉글랜드의 목회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테일러의 책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죄의 종이 되었고, 스스로 자신의 구원을 위해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성경적 원죄 사상을 부정하는 알미니안 신학의 원죄 사상을 전파하였다.

칼빈주의자들은 그 책을 건전한 신앙을 파괴하는 사탄의 독이라고 여겼고, 아이작 왓츠(Isaac Watts), 데이비드 제닝스(David Jennings) 등이 반박하는 책을 출판하여 대응하였으나 큰 효과를 얻지는 못했다. 알미니안 신학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성장한 존 웨슬리(John Wesley)까지도 이 책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면서 나름대로 대응하려고 궁리하였을 정도였으니 이 책의 내용이 얼마나 위험스러웠는지 짐작할 수 있다.1) 에드워즈는 스코틀랜드 친구 어스킨이 보내준 이 책을 읽고 다음과 같이 우려하였다.

“우리의 경건하고 탁월한 신앙의 선조가 견지한 기독교 원리와 체계를 뉴잉글랜드의 서부에서 뿌리째 없애는데 (이 책만큼) 큰 영향을 미친 책은 없었다.”2)

진리를 위한 에드워즈의 열정의 결실인 「원죄론」이 출판되어 인간의 전적타락과 오직 하나님의 택하심과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을 부정하는 알미니안 신학의 원죄론과의 전쟁에서 칼빈주의는 우위를 점유하게 되었고 뉴잉글랜드에서 알미니안 사상은 상당히 후퇴하였다. 에드워즈는 이렇게 칼빈주의 신앙을 수호하는 전쟁에 자신의 일생을 헌신한 인물이다.

 

칼빈주의와 어울리지 않는 에드워즈의 신비주의

그런데 이런 그림과 도무지 조화되지 않는 또 다른 그림이 에드워즈의 신앙에서 함께 나타난다. 그것은 에드워즈가 숲이나 조용한 곳에서 묵상하면서 경험한 환상 같기도 하고, 상상 같기도 하고, 허상 같기도 한 이상한 영적 체험이다. 그리고 그가 설교하고 인도했던 집회에서 사람들이 쓰러지고, 몸이 진동하고, 몸이 마비되고, 환상을 보고, 비정상적으로 울부짖고 ... 등의 훗날의 은사주의 집회 현상들도 나타났다는 것이다.

에드워즈가 묵상하다 체험했던 현상들을 다시 살펴보자. 다음은 에드워즈가 남긴 기록을 백금산 목사가 번역하여 자신의 저서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 수 없을까?」에서 소개하여 준 내용이다.
 

   

 

“때때로 산 속에 혼자 있거나 어느 한 적한 들판에서 모든 사람들에게서 멀리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달콤하게 대화를 나누거나 하나님 안에서 완전히 몰입해 있는 일종의 어떤 환상이나 끊임없는 생각 또는 상상에 빠지고 했습니다.”(166 페이지)

“목장을 걸어다니면서 하늘과 구름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내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위험과 은혜에 대한 달콤한 느낌이 내 마음 속에 일어났습니다.”(166 페이지)

“거의 만물에 하나님의 영광이 고요하게 그리고 달콤하게 나타나 있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순수함, 하나님의 사랑이 만물 안에 나타나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 그리고 이런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달콤한 영광을 보았습니다. ”(167 페이지)

“해마다 내 시간의 대부분을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을 묵상하는데 사용했습니다. 종종 숲 속이나 조용한 곳을 혼자서 걸으면서 묵상하고 기도하고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168 페이지)

“종종 나는 시내에서 좀 떨어진 허드슨 강가의 조용한 곳에서 휴식하면서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을 묵상하고 은밀하게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곳에서 달콤한 시간을 가졌습니다.”(173 페이지)

“거기서 약 3개월 동안 아파서 누워있었습니다. 병중에 있을 때 기쁘게도 하나님께서 성령의 달콤한 능력으로 나에게 다시 찾아오셨습니다.”(176 페이지)

“노샘프턴에 온 이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완전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함을 보면서 종종 하나님 안에서 달콤한 만족을 누렸습니다. 하나님은 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 때문에 나에게 영광스럽고 사랑스러운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177 페이지)

“하나님은 나에게 삼위일체적인 분으로 영광스러운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 때문에 나는 하나님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는 하나님에 대한 품격 높은 사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179 페이지)

“나는 종종 그리스도의 탁월한 충만하심을 체험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가 구세주로서 온유하시고 적임자이신 것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보다 만 왕으로서 내게 나타나셨습니다.”(180 페이지)

“1737년 어느 날, 나는 건강을 위해 말을 타고 숲 속으로 갔습니다. 휴식 장소에 도착해 평소처럼 말에서 내려 걸으면서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고 기도했습니다. 그 때 나는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즉, 그 분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 되신 것과 그 분의 놀랍고 위대하며 충만하고 순수하며 달콤한 은혜와 사랑, 또한 그 분의 온유하고 부드러운 겸손하심을 보았습니다.

이 은혜는 아주 조용하고 달콤하게 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보다 크게 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하게 보였습니다. 그리스도의 탁월함은 모든 생각과 개념을 삼킬 만큼 충분했습니다. 이 체험은 제가 판단하기에 약 한 시간 가량 계속되었습니다. 그 시간 내내 나는 눈물을 홍수처럼 쏟으면서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나의 영혼이 텅 비어 버리고 없어져 버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 나는 다른 때에도 여러 번 이와 아주 비슷한 체험을 했는데 그 때마다 같은 감동을 받았습니다.”(180-181 페이지)

“나는 여러 번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서 삼위 하나님의 영광을 느꼈고 성령의 성결케 하시는 사역을 느꼈습니다. 성령의 거룩한 역사로 하나님의 빛과 생명이 영혼 속에 전달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전달하심을 통해 무한한 영광과 달콤한 샘으로 나타나셨습니다.”(181 페이지)

“최근 몇 년 동안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더욱 충만하게 그리고 더욱 지속적으로 체험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러한 하나님의 주권을 즐기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에 계시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더욱 많이 체험하고 있습니다.”(184-185 페이지)

 

에드워즈의 이런 경험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에게 나타난 특별계시가 담긴 환상과는 달라 보인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나타난 환상은 분명한 내용이 있었으나, 에드워즈의 경험은 뭔가 일어나기는 했는데, 무엇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모호하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결코 아니다. 환상이라고 해야 할지, 느낌이라고 해야 할지, 상상이라고 해야 할지 ...

 

에드워즈와 성령의 특별한 은사

에드워즈는 환상 보는 것에 대하여 어떤 신학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을까? 에드워즈가 딱히 환상 하나를 분명하게 언급하면서 자신의 신학적인 입장을 밝혔던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오는 말씀이 담긴 ‘충동’(impulse)이 일어나려면,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에게 임한 ‘영감’(inspiration)이 임하여야 한다고 보았고,
그런 ‘특별한 은사’(extraordinary gifts)는 사도시대에만 존재했다고 보았다.3) 에드워즈가 1742년에 남긴 말 속에는 더욱 더 분명하게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가 나타나지 않음을 명시한다.

“현재의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역사하심에 매우 해를 미치는 잘못된 것 하나는 오늘 날 하나님께서 직접적인 계시나 영감(inspiration)으로 성도들을 인도하여 주신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오류를 보호하여 주고 계속 지지하여 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에 의해 인도되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한, 그 사람은 잘못된 행실로부터 벗어나고 변화되지 못할 것이다.”4)

에드워즈는 사도시대 이후로는 하나님의 계시가 내포된 예언, 환상 등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도시대에만 있었던 성령의 특별한 은사와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의 신학적 관점에 의하면 하나님의 메시지가 담긴 방언과 예언은 이제 더 이상 나타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때, 에드워즈는 은사중지론자였다.

그렇다고 에드워즈가 환상이나 그 비슷한 것에 대해 완전히 문을 닫았던 것은 아니었다. 자기 부인 사라가 몇 번이나 입신하여 천국의 황홀함을 맛 본 것에 대해 에드워즈는 심히 기뻐하였고, 끝까지 사라가 경험한 일을 매우 아름답게 기술하며 사람들에게 성령의 성화되게하는 사역의 본이 되는 사례로 이야기했다. 1차 부흥(1734-35년) 당시 환상을 보는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 에드워즈의 대응은 환상 보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근거가 있는 체험과 신비적이고 공상적인 체험의 차이를 가르치기 위해 많은 수고를 했다고 한다.5)

에드워즈는「균형잡힌 부흥론」(Some Thoughts Concerning The Present Revival Of Religion In New England, 1742)에서도 영적인 체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자연적이고 육신적인 불순물이 전혀 섞이지 않은 전적으로 순수하고 온전히 영적인 어떤 체험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6)

에드워즈의 이 말은 영적인 체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잘 분별하여 대처하여야 한다는 의미이다.7) 여기서 에드워즈가 말한 영적 체험에는 어떤 것들이 포함될까? 성령의 사역으로 인한 환상이나 입신이 포함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환상에 대해 에드워즈는 선지자들과 사도들처럼 하나님의 계시를 담고 있는 환상에 대해서는 부정하였고, (에드워즈가 잘 쓰는 표현으로) 성령이 신자들을 성화시키고 그리스도의 아름다음을 신자들에게 전달하여 주는 성령의 영광스러운 사역으로서의 환상에 대해서는 분별을 전제로 인정했다.

에드워즈의 이런 성향 때문에 개혁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이 서로 에드워즈가 자기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계시를 동반하는 성령의 특별한 은사들이 사도시대에만 국한되었다고 하였으므로 개혁주의자들의 지지를 얻었고, 동시에 성령의 특별의 사역으로서 환상 등을 경험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인정했으므로 은사주의와 신사도 운동가들의 지지도 얻었다.

 

에드워즈와 관상기도

에드워즈가 체험한 환상 같기도 하고, 허상 같기도 하고, 상상 같기도 한 특이한 영적인 체험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나는 처음부터 에드워즈의 그런 모습이 관상기도하는 사람의 모습과 유사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전 에드워즈가 숲에서 묵상하다가 경험한 특별한 일에 대한 글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했었다.

“과연 이것은 로마서가 말하는 자연계시의 영역에 속하는 정당한 은혜일까? 중세의 수도사들이 추구한 신비적인 영적인 경지, 또는 관상기도하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은혜와는 아주 다른 것일까?”(정이철)

관상기도에서 나타나는 현상과 유사하다는 의문을 가졌던 이유는 에드워즈가 체험한 내용이 은사주의자들이 말하는 환상과는 달라 보이기 때문이었다. 은사주의자들의 환상은 선명한 이미지로 나타나고, 그 속에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가 있다고 주장된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글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 또는 성자의 신적인 아름다움을 달콤함, 신비함, 기쁨, 즐거움 등의 말할 수 없는 행복감 속에서 경험했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리고 에드워즈는 그런 체험들을 통해 계시를 받았다고는 하지 않았다.

에드워즈가 남긴 글을 번역하여 소개하여 준 백금산 목사는 에드워즈가 어떤 단어들로 자신의 하나님 체험을 표현했는지를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하나님 체험에 대한 내용들을 그의 자서전에서 여러 가지의 용어로 표현합니다. 즉 감각하다(sense), 보다(see), 나타난다(appear), 여겨진다(seem), 느껴진다(feel), 체험한다(experience), 맛보다(taste)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8)

“에드워즈가 하나님을 체험한 경험은 무엇보다 달콤하고 기쁘고 즐거운 체험이었다는 것을 그는 달콤함(sweet), 즐거운(delight), 기쁜(joy), 유쾌한(pleasant) 같은 형용사로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용어들의 빈도수는 에드워즈 자서전의 거의 매 페이지 마다 나타나고 있습니다.”9)

 

에드워즈가 사용한 단어들은 다음과 같다.

‘감각하다’

‘보다’

‘나타난다’

‘여겨진다'

‘느껴진다’

‘체험한다’

‘맛보다’

‘달콤함’

‘즐거운’

‘기쁜’

‘유쾌한’

이와 같은 단어들로 표현되었던 에드워즈의 영적인 경험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말씀의 의미를 깨달은 것에 대한 기쁨을 표현하려고 이런 단어들을 사용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대체 어떤 신비한 경험이었기에 이런 단어들로 표현하였을까? 이전에 가졌던 이 생각을 또 한 번 더 하게 되었다.

“에드워즈가 묵상했다더니 관상기도를 한 것인가?”

신사도-은사주의 성향의 관상기도 지지자들이 점점 늘고 있는데, 그들은 관상기도를 통하여 ‘주 임재 체험’을 한다고 한다. 관상기도하는 추구했던 가장 궁극적인 것은 ‘신인합일’의 경지이다. 이상하게도 에드워즈의 신비 체험을 관상기도와 연관시키면 그림이 자연스러워진다. 그러나 현대의 은사주의자들의 환상 체험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청교도 인물과 관상기도가 무슨 연관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

이것이 일반적인 통념이므로 에드워즈의 그 체험과 관상기도를 연관시킨다는 것은 상상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데 의외의 곳에서 주목되는 내용이 발견되었다. 2018년에 예장 고신으로부터 교류금지 대상으로 결정된 사람이 있는데, <바른믿음>을 열심히 읽으면서 자신의 사상과 다른 글에 대해서는 “정이철이 ....”라는 제목의 비판의 글들을 자주 올리는 사람이다. 이 분은 관상기도를 강력하게 지지한다. 이 분이 쓴 관상기도에 대한 글 링크를 누군가 나에게 보내주었다. 읽어보니 이 분이 2015년에 쓴 글이었는데, 놀랍게도 청교도들과 관상기도가 많은 연관이 있었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자료를 소개하고 있었다. 그가 이 글을 쓴 이유는 자신이 좋아하는 관상기도를 개혁주의자들이 이단시하는 것에 반발하여 개혁주의의 조상인 청교도들도 관상기도와 친밀했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다.
 

   

 

청교도와 관상기도 신비주의

시카고의 휘튼대학(Wheaton College)의 실천신학 교수인 탐 쉬안다(Tom Schwanda) 박사의 저서「영혼의 재창조: 청교도주의의 관상적 신비적 경건」(Soul Recreation: The Contemplative-Mystical Piety of Puritanism, 2012)이 소개되어 있었다. 이 책은 청교도와 관상기도가 연관이 없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대부분의 청교도들이 관상기도를 즐겼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책이라고 한다. 저명한 신학자 J. I 패커(J.I. Packer)가 이 책의 서문의 글을 장식했는데, 그는 청교도들의 관상기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쉬완다 박사는 하나님 안의 즐거움을 강화하는 통로인 관상기도를 갱신하는 (청교도 역사의) 회복이 오늘날 건전한 복음주의 영성에 훌륭한 기여를 할 것으로 믿는데, 나 또한 옳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아이작 앰브로즈에 관한 연구서인 이 책을 열정적으로 추천한다.”

 

풀러신학교 총장인 리차드 마우(Richard Mouw)는 추천사에서 청교도들의 관상기도를 인정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훌륭한 책에서 탐 쉬안다는 최근에 우리가 후회할 정도로 비밀로 하고 있었던 사실-청교도들이 진정한 크리스천이 되는 것, 더 나아가서 심오한 깔뱅주의자가 되는 것 즉 신비주의에 대한 가르침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 책의 132페이지에는 대표적인 청교도 지도자 존 오웬의 말이 실려 있는데, 존 오웬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함, 소망, 사랑 및 은혜를 ‘관상’할 때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는 교제의 작은 일부이다”

 

이 책의 저자의 연구에 의하면, ‘관상적-신비적 경건’이 주류 청교도들에게 보편적인 현상이었다고 하는데, 만일 그렇다면 에드워즈에게도 관상기도 성향이 있었을 수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에드워즈가 1737년 말 타고 숲에서, 그리고 다른 곳에서 자주 경험했다고 자서전에 기록된 환상 비슷한 신비한 체험들이 관상기도의 영성이었다고 해석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과연 에드워즈와 그 시대의 사람들과 관련 문헌에서 ‘영성’이라는 말과 ‘묵상’이라는 단어들이 빈번하게 나올 때, 그쪽으로 약간 신경이 쓰이기도 했었다. 속단하지는 말고 이후 여러 사람들이 연구하는 가운데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지켜보도록 하자.

 

--- 미주 ---

1)「원죄론」(에드워즈 전집 제4권, 김찬영 역) (부흥과개혁사, 2016), 16.

2)Ibid., 34.

3)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2, 274. Iain H. Murray, Jonathan Edwards: A new Biography (Calisle, PA: The Banner of Truth Trust, 1996), 242.

4)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vol 1. 274. Iain H. Murray, 243.

5)George M. Marsden, Jonathan Edwards: A Life (New Haven,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2003), 162.

6)Edwards, Some Thoughts, WY 4:439. 이상웅,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론」(부흥과개혁사, 2013), 400.

7)이상웅, 400.

8)백금산,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 수 없을까?」(부흥과개혁사, 2011), 155.

9)Ibid.

정이철 cantoncr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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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리훈 2018-12-12 09:09:30

    청교도들은 회심(회개+믿음)의 과정에서 감정적인 요소를 중히 여겼다. 그리하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 대한 두려움과 슬픔 등의 감정의 체험이 없으면 참된 회심도 없다고 주장했다.

    청교도의 마지막 주자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도 참된 회심의 과정에서 두려움이나 애통 등의 감정적 체험을 중히 여겼던 것 같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며 구원받은 그로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너무 커서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자기의 믿음의 반응을 마치 사랑하는 남녀가 자기의 애정을 풍부한 감성적 요소로 나타낸 것 같이 표현하지 아니 하였나 생각된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은 언약의 관계로 연합되어 있는데, 구약에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과의 관계로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로, 또한 신랑과 신부와의 관계로 묘사되고 있다. 사도 바울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 11: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2)”

    아가서에서도 예수님과 신부인 우리가 어떠한 관계이어야 함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관계로 그 분만을 바라며, 그 분만을 의지하며, 그 분만을 사랑 하여야 한다. 이러한 표현들이 Jonathan Edwards의 글에 적나라하게 나타나고 있다.

    정이철 목사는 “에드워즈가 체험한 환상은 특별 계시가 없는 환상이었으며 환상에 대하여 자신의 명확한 신학적 입장은 밝혔던 적은 없는 것 같다”고 하였다. 매우 중요한 점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요즘 은사주의자들과 성령운동가들은 꿈이나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며 그 계시를 직접 말하며 또한 예언도 하지 않는가?

    청교도들의 관상기도를 연구한 탐 쉬완다(Tom Schwanda) 박사는 청교도들의 감성주의를 신비주의적 차원으로 오도한 것 같다. 관상기도의 목적은 신일합일을 이루는 것인데, 그것은 영지주의의 단일론에 기초한 것이다. 청교도 신학이 이단 영지주의 사상을 기독교에 접목하려고 하였을까? 한때 유명하였던 신학자들이 올바른 신앙에서 벗어나면 종국에는 곁길로 빠지는 것을 많이 보게된다. 신학과 신앙은 일치해야 하며, 사변적이 아니라 실천적이며 목회적이어야 한다는 멜랑히톤의 글이 생각난다.신고 | 삭제

    • 인간의 수행은 거짓말 2018-12-12 00:01:29

      성철이란 스님이 기자에게 한말은 자신의 거짓말에 속지마라 했던 일화는종교에 관심이 있던 사람들에게 화두 였습니다.하나님의 말씀 선포는 하나님 의지를 선포하는 것입니다.거기에는 어떠한 인간의 지정의가 틈을 타고 하나님의 의지를 훼손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성과 감성과 의로움이 결합된 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우리의 지정의가 결합된다면 인간의 인격으로 하나님을 깨닮음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러면 성철스님 처럼 거짓말에 속지마라 는 역설적인 거짓말에 빠지는 꼴인것이다.인간의 인격을 사용하는 이가 하나님이 라고 하지만 이미 자신의 인격이하나님을 아는 것처럼 거짓말에 속는 다는 것이다.성철스님 이 나는 지옥에간다 라고 하면서 열반하였다고 한다.극한의 수행 인간이 10년을 벽만보고 수행했다는 것은 앞으로도 그 기록은 깰수없다 할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깨달았다는 것은 -나는 지옥에간다-(이말은 불교에서 중생을 구원하로 간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기에 당연히 지옥갔다. 알면서도 인간의 알량한 끼리끼리의 인연과 거짓말의 인간의리 때문에 그러니 성철스님은 벽만 10년보고 아무것도 모르고 죽었다.)

      기독교에서도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셨다가 부활했다고 주장하는 거짓말쟁이들이 있다.불교의 긍극의
      해탈은 무아無我이다. 말그대로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번뇌도 생사화복도 거짓말이며 속였다해야 진실이 라고 생각하고 그래야 세상은 속고 속이이는 거짓에서 벗어난다 .이것이고집멸도 의 인연을끝장 내는 것이다.언제가 부터 교회 강단에서 정치적 인물 ,철학자,역사가,경제학자,들에 말이 하나님 말씀과 혼합되었다.인간의 극한의 고행인 10년면벽의 성찰로 불교계의 부처의화신이 되어버린 성철스님이 남긴 말은 -자신의 거짓말에 속지말라여 였다. 하나님이 성경을 주실때는 그속에 진리가 있다는 것이다.그리고성경은 앞으로 천을 곱한 천년의 시간이 가도 인간이 알수 있는 것만 알수 있다.

      인간이 인간적인 인격으로 하나님을 해설할때 알수 있는것은 자신이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알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인격을 사용하심니다-

      내삶의 주인은 하나님이되야 하고 하나님은 모든것에 주인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 도다.신고 | 삭제

      • 김만옥 목사님 페북 2018-12-11 22:58:57

        청교도들은 칼뱅보다 성 버나드를 중시여겼다. 그래서 그들은 신비주의를 추구했다. 그래서 수도원의 신비적 체험과 관상기도를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이다. 특히 청교도 사상의 핵심 인물인 오웬과 에드워즈가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최근의 탐 쉬안다의 책에서 청교도들이 관상기도를 즐겼다는 주장하는데, 이 책의 추천자가 청교도 사상가로 유명한 제임스 패커다. 그리고 신칼빈주의자 중 한명인 존 파이퍼도 관상기도를 주장한다. 그리고 미국의 신학교육에서 수많은 신학교들이 영성형성으로 하고 있다는 비참한 현실이다

        관상기도가 필요한가? 절대 아니다! 이 기도는 주객전도가 될 위험성이 크다. 그래서 영적 분별을 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대표적인 인물이 에드워즈이다. 속된 말로 똥인지 된장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청교도들은 관상기도를 중시하여 아가서의 해석도 속된 말로 영해를 하였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그러면서 자신들은 바르게 성경해석을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들은 칼빈주의자라는 말을 싫어했고 성경주의자이라고 하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사실상 성경보다는 체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성경보다는 사실상 이성 중심이었다.

        개신교스콜라주의

        그래서 그들이 추구한 것은 사실상 신비적 체험과 이성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매우 성경적인 집단인 것처럼 과장했다. 그렇다! 청교도는 기독교 역사에서 보면 17세기 이성 중심이 되고 다시 18세기 감정 중심이 되는 시대적 영향을 잘 받아서 만들어진 집단이다. 그래서 그들은 17세기에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라는 개신교스콜라주의 최대 작품을 만들고 18세기에 에드워즈라는 사실상 신비적 체험을 중시하여 거짓 부흥을 만든 것이다.

        깊이 생각해 보자. 미국교회사에서 제 1. 2차 대각성운동, 오순절운동 등이 과연 진정한 부흥운동이었는가? 신학적 배경을 잘 알면 아니다! 에드워즈, 피니, 은사주의 ... 무서운 사실은 이 시기에 이단이나 사이비도 등장하고 성장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전 세계적인 이단들이 등장한 시기가 이 때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났는가? 성경 중심의 16세기 루터와 칼뱅의 정신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영적 체험은 성경으로 충분하다." 성경에서 나오지 않는 자연적이거나 초자연적 체험은 사실상 불필요하다. 왜? 성령님은 반드시 말씀과 함께(cum verbo)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적 체험은 설교, 성찬, 성경을 통한 기도로만 충분하지 자연적이거나 초자연적 신비적 체험은 사실상 필요 없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청량음료 좋아해 봐야 몸만 망가지니 정신차리고 생수를 먹자!신고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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