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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러더포드, 찰스 1세, 올리버 크롬웰의 격돌

기사승인 2019.05.23  12: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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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5년 3월 27일, 제임스 1세 사후(死後), 그의 아들 찰스 1세(CharlesⅠ, 1600/재위1625-1649)가 왕좌에 즉위했다. 우리는 제임스 1세가 스코틀랜드에서부터 장로교를 거부하고 박해한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1603년 잉글랜드 제임스 I세로 통합왕이 되었을 때도 그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천인청원(Millenary Petition, 1603년)에 의해서 진행한 흠정(欽定) 성경 번역을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1625년에 즉위한 찰스 1세는 15살의 프랑스 앙리 4세(Henri IV, 1553-1610)의 딸, 로마교회 신자인 앙리에트 마리(Henrietta Maria of France, 1609-1669)와 6월 13일에 혼인했다. 마리는 1649년 찰스 1세가 처형될 때, 두 아들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를 데리고 프랑스로 망명하여 스튜어트 왕조를 보존하여 복구할 수 있게 했다.

1605년 로마 교황주의자인 로버트 개츠비(Robert Catesby, 1572-1605)를 비롯한 공모자들이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를 폭발로 암살을 모의했는데 실패했다(화약음모사건, The Gunpowder Plot, 예수회 역모라는 의견도 있음). 이로 인해서 잉글랜드에서 로마 교황주의에 대한 향수는 사라졌다.

찰스 1세는 자기 아버지보다 더 강력하게 주교주의 국교회(Anglican Church)를 기반으로 왕권을 세우려고 했다. 그런데 세수 정책과 외교 정책(프랑스와 스페인과 전쟁을 일으킴)에 실패하면서 1628년 의회의 승인으로 과세, 출병해야 하는 권리청원(Petition of Rights)에 서명해야 했다.

그러나 찰스 1세는 왕권과 국교회를 강화시키고 의회를 무시하면서 내전(內戰)까지 불사했다. 잉글랜드에서 1215년 존 왕이 ‘대헌장(Magna Carta)’에 서명하면서, 400여 년 동안 왕과 의회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스코틀랜드 출신 왕들은 잉글랜드의 전통을 잘 알지 못하고 왕권신수설을 과도하게 주장한 것이다.

스코틀랜드 출신인 찰스 1세는 왕권신수설에 집착한 대표적인 왕이다. 찰스 1세의 왕권신수설의 지지에는 버킹엄 공작(George Villiers, 1st Duke of Buckingham, 1592-1628)의 역할이 지대했다. 혼인을 주도했고, 스페인 파병, 프랑스 위그노 지원 등을 주도했다. 모두 실패했고 찰스 1세의 멸망의 근원이 되었다. 잉글랜드 의회는 찰스 1세에게 1628년 권리청원(權利請願, Petition of Rights)을 제출했다. 권리청원에 서명한 찰스 1세는 1629년 의회를 해산시키고 전제 정치를 유지했다.

국교회를 강화하기 위해서 찰스 1세는 윌리엄 라우드(William Laud, 1573-1645)를 1628년 런던 대주교로 1633년 캔터베리 대주교로 세우면서 진행했다. 라우드는 로마 교회와 화해를 추구하며 청교도를 박멸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제임스 1세 시절, 1618년 도르트 회의에 참석하여 항론파에 찬동하기도 했다. 찰스 1세와 라우드의 박해가 강화되자 1630년경에 분리파 1,000여명은 식민지로 도피했고, 1640년에 2,000여명이 줄이어 도피했다(Moore: 2018, 71).

스코틀랜드는 앤드류 멜빌(Andrew Melville, 1545-1622)의 사역으로 1574년부터 1596년까지 스코틀랜드 장로파는 황금기를 가졌다. 1578년에 제2치리서를 작성했고, 1592년 스코틀랜드에 장로교가 국교회가 되었다. 그런데 잉글랜드 국왕으로 간 제임스 I세의 반격으로 긴장은 다시 고조되었다. 1610년에 제 1차 주교제도를 부활시켜서 스코틀랜드는 장로 제도와 주교 제도가 공존하는 형태가 되었다. 1618년 퍼스(Perth)시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퍼스 5개 조항’(Five Articles of Perth)을 통과함으로써 감독 제도를 전환시켰다.

1636년 찰스 1세는 라우드와 일련의 국교회 사제들과 함께 퍼스의 5조항(Five Articles of Perth)에 더 강화된 <규범집>(Book of Canons)을 작성하여 장로교회의 모습을 제거하려고 했다. 1637년에 예배의식서인 <공동기도문>(Book of Common Prayer)을 작성해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교회에 도입시키려 했다. 라우드는 강단 설교를 금지하고 의식, 의복을 통일시키려고 했다.

이 때문에서 잉글랜드에서는 불만이 고조되었고, 스코틀랜드에서는 불만이 폭발하고 말았다. 이 결정에 강력하게 반대한 스코틀랜드 언약도는 알렉산더 헨더슨(Alexander Henderson, 1583-1646)이다. 찰스 1세는 주교 제도를 스코틀랜드에 재도입시키려고 런던 주교인 라우드를 통해서 시도했다.

1637년 7월 23일 새로 작성한 예식서를 따라, 존 낙스(John Knox, 1514-1572)가 사역했고(1560-1572) 무덤이 있는 세인트 자일스 교회(St. Giles Cathedral)에서 미사를 진행했다. 그 때에 행사에 참석한 제니 게디스(Jenny Geddes, 1600-1660)라는 한 여인이 일어나서 미사를 거부했다. “Deil colic the wame o’ ye, fause thief; daur ye say Mass in my lug?”(마귀가 당신의 배 속에 가득한, 거짓말 하는 도둑, 어떻게 감히 내 귀에 미사가 들리게 하는가?, Devil cause you severe pain and flatulent distension of your abdomen, false thief: dare you say the Mass in my ear?)를 외치면서 사제를 향하여 의자(스툴, Stool)를 집어던짐으로써(그 의자는 아직도 세인트 자일스 교회 안에 보관되어 있음), 저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은 제니 게디스의 스툴에서 시작되었다.

스코틀랜드 언약도인 존 낙스, 앤드류 멜빌, 사무엘 러더포드는 국왕을 향해서 거룩한 복음과 주의 권위를 담대하게 선포했다. 스코틀랜드 장로파들은 국왕도 복음 앞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순종해야 한다는 주의 사자(使者)에 대한 의식이 있었다. 반면 잉글랜드 분리주의자들은 국왕의 통치와 간섭을 벗어나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추구하며 식민지로 이주했다. 분리파들은 왕이 없는 “언덕 위에 도시(a city upon a hill)”를 꿈꾸며 신대륙으로 이주했다.

1606년 잉글랜드 105명이 이주하여, 1607년 버니지아 주에 최초 도시 제임스타운(Jamestown)을 건설했다. 1620년 9월 102명이 메이플라워호(Mayflower)를 타고 영국의 플리머스 항구를 출발하여 11월에 플리머스(Plymouth Colony)를 출발해서 메사추세츠(Massachusetts)에 상륙했다. 상륙하기 전 41명이 메이플라워 서약(The Mayflower Compact)에 서명했다.

1625년 찰스 1세는 아버지보다 더 강력한 박해 정책을 펼쳤다. 왕은 청교도들의 식민지 이주를 특허장(Charter)을 주며 허용했는데, 반대파를 제거하는 암묵적인 장려 행위로 분석하기도 한다. 존 윈스럽(John Winthrop, 1588-1649, 식민지 초대총독)은 1630년 1,000여명이 17척의 배로 식민지로 향했다. 그는 배 위에서 "우리는 언덕 위의 도시가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의 눈이 우리를 향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1637년 세인트 자일스 교회당에서 시작된 스코틀랜드 장로파의 저항 운동은 1638년 2월 28일 에딘버러의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당(Greyfriars Kirk)에 모여 “국가 언약(National Covenant)” 문서에 서약하면서, 스코틀랜드 장로파는 언약도(the Covenanters)라고 불리게 되었다. 스코틀랜드 언약도들은 스코틀랜드에 주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될 수 있도록 참가자들이 언약(covenant) 문장에 서약한 것이다.

언약도에 행위에 대해서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는 왕은 반역으로 규정했고 50년(1638-1688년)동안 해체하려고 시도했다. 이 기간에 1만 800여 명이 순교로 언약을 지켰다. 1688년까지 50년을 “언약파의 시기”라고 부른다(이상규: 1979, 31). 이들이 지킨 신앙이 스코틀랜드 장로파였는데, 1688년 명예혁명,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로 세계정신은 신정국가 수립이 불가한 정교분리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교회의 머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만유의 주이심임을 고백하고 실현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1638년 스코틀랜드 언약도들은 거룩한 왕국을 구현하기 위해서 생명을 건 언약을 체결했고, 무력 저항을 선택했다. 그들의 바르고 헌신적인 믿음의 모습을 포기할 수 없고, 그들의 희생 위에 미국과 대한민국의 장로교회가 있다.

장로파들이 바른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한 행동은 세계교회사에서 찾을 수 없다. 프랑스 위그노는 30년 전쟁에서 낭트 칙령(Edict of Nantes, 1598년)을 맺었지만, 루이 14세는 한 왕에 한 믿음(un roi, une foi)이라는 정책으로 퐁텐플로 칙령(Edict of Fontainebleau, 1685년)을 발효시켜 낭트 칙령을 해체하고 위그노를 무자비하게 박해했다. 이에 위그노들은 도피로 본래 위그노 신학은 소실되고 말았다. 지금은 프랑스 신앙고백서만 남아 있을 뿐이다.

프랑스 교황주의가 실행한 성 바돌로매 학살 사건(St. Bartholomew's Day Massacre, 1572년)은 유럽인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고, 퐁텐플로 칙령으로 언약을 무단 파기하는 것과 무자비한 학살은 유럽 지성인이 감당할 수 없었다. 퐁텐블로 칙령으로 20만-100만 명으로 추산되는 위그노가 프랑스를 떠났다. 루이 14세는 1686년 1월 17일 “80만-90만 명의 위그노 중에서 지금 프랑스에 남은 자는 1000-1500명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발언한 기록이 있다. 결국 프랑스 혁명(1789-1799)으로 프랑스는 왕과 국교를 상실하고 말았다. 1799년 11월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하면서 혁명 공화국은 종결되었다.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난 국가 언약에 대해서 찰스 1세는 해밀턴(Hamilton) 후작을 특사를 보내 조정하려고 총회 개최를 명령했다. 1638년 11월 21일 글래스고 대교회당에서 18년 만에 총회가 개최되었다. 240명의 총대가 모였고 해밀턴이 연설했지만, 총회장에 알렉산더 핸더슨(Alexander Henderson, 1583-1646), 서기에 존스톤이 선출되었다. 핸더슨은 잉글랜드 국교회 주교의 종으로 살기보다는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종으로 죽기를 소망한다고 외쳤다.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는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가 작성한 <공동기도서>를 폐지하고, 주교제도를 주장하는 주교들을 모두 파문시켰다(김중락: 2017, 236-237).

1639년 찰스 1세는 주교제도 폐지한 스코틀랜드를 명분으로 병력을 파견하여 정복하려고 했고, 언약파도 무력저항을 선언했다. 김중락은 언약파들이 탁월한 전략 전술과 프로파간다 기술로 임전했다고 설명했다(김중락: 2017, 240). 이 때 스코틀랜드 언약도들의 지도자들은 알렉산더 핸더슨과 사무엘 루터포드 같은 목사들이었다. 스코틀랜드 언약도는 부당한 압박에 대해서 무장 봉기를 감행했다.

스코틀랜드에는 대륙에서 전투 경험이 풍부하고 유능한 군인들 제임스 그래엄(James Graham, 몬트로즈 후작, 1612-1650)과 알렉산더 레슬리(Alexander Leslie, 리벤 백작, 1582-1661)가 돌아왔는데, 언약도와 함께 행동했다.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큰 캠벨(Campbell) 가문의 좌장이자 최고 귀족인 아치볼드 캠벨(Archibald Campbell, 아르가일 후작, 1607-1661)까지 언약도에 가세했다. 잉글랜드 분리파들은 부당한 압박에 대해서 식민지로 이주해서 자기들의 이상향인 언덕 위의 도시를 건립하려고 했다. 제네바의 칼빈은 시(市)와 주변 칸톤(Canton)들과 외교 관계에 능통한 경륜이 있었고, 스코틀랜드의 언약도들은 군 전략을 운용할 수 있는 경륜이 있었다.

1, 2차 두 차례에 걸친 주교 전쟁(Bishop's War)은 스코틀랜드 언약도의 승리로 끝났다(1, 2차 주교전쟁에 대해서 김중락의 󰡔스코틀랜드 종교개사󰡕(흑곰북스)에서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찰스 왕은 복수의 칼을 갈면서 후퇴해야 했다. 스코틀랜드 언약도들이 잉글랜드에 활용한 프로파간다의 내용은 잉글랜드 교회의 개혁의 필요성을 주입시킨 것이었다. 결국 스코틀랜드 굴복을 추진했던 왕과 의회는 갈등을 피할 수 없었다.

1639년 1차 주교 전쟁은 5주 만에 종결되고 버윅에서 평화협정(Treaty of Berwick)을 체결했다. 그런데 1640년 찰스 1세가 의회를 소집했다가 3주 만에 해산시켰다(단기의회, Short Parliament). 그리고 2차 주교 전쟁을 일으켰으나 금방 패배하고 리폰 조약으로 종결했다. 스코틀랜드는 찰스 I세에게 850만 파운드를 전쟁배상금으로 요구했고, 왕은 어쩔 수 없이 1640년 11월에 의회를 다시 소집해야 했다.

그런데 단기의회와 달리 의회가 종결되지 않고 1660년까지 진행되었다(장기의회, Long Parliament). 1640년 개회된 의회는 1641년에 강제력을 발동시켜 캔터베리 대주교 라우드와 재정장관 스트래트포드(Stratford) 백작을 반역 행위로 구금시켰다. 스트래트포드는 왕명(王命)을 수행해서 죄가 없는데, 스트래트포드의 위력을 두려워한 의회파는 반역자에게 재판이 필요 없다(개인권리를 무시함)는 사권박탈법(Bill of attainer)으로 처형시켰다. 왕은 가장 중요한 두 신복을 잃었다.

찰스 I세는 스페인, 프랑스 국외 전쟁에도 개입해서 재정을 낭비했다. 제임스 I 세는 “전쟁을 시작하기에는 충분하나, 전쟁을 계속하기에는 미심쩍은 재정 수준”을 잘 인식한 반면, 찰스 I 세는 무모하게 전쟁을 수행했다. 결국 1628년 권리청원(Petition of Rights)이 제출한 의회를 해산시키고, 1629년 4월에는 프랑스와, 1630년에는 스페인과 평화조약을 맺고 전쟁을 공식적 종료했다.

그런데 1630-1640년까지 주교 전쟁을 진행하다가 결국 왕의 목숨뿐만 아니라 왕조까지 상실될 위기를 맞이했다. 찰스 1세는 주교 제도를 위해서 스코틀랜드 언약도와 잉글랜드의 청교도를 박해했고, 켄터베리 대주교는 구교로 회귀하기 위해서 왕과 결탁했다. 로마 교회의 예수회는 끊임없이 잉글랜드를 구교로 돌이키려고 시도했다고 한다. 17세기 브리튼 섬(Britain)은 신앙, 정치, 사상에서 너무나 복잡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장기의회는 찰스 1세의 요구에 순순히 순종하지 않았다. 종교문제에 있어서는 청교도 신앙을 보장하여 영국교회의 주교제도의 폐지 도입을 요구했다(이상규: 1979, 38). 왕은 왕권신수설을 포기하지 않았고, 의회파도 법치주의를 포기하지 않았다. 왕은 의회를 마음대로 해산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1641년 아일랜드에서 반란이 일어나 국교도들이 3,000여명이 살해되었다. 1641년 12월 의회는 대항의서(Great Remonstrance)를 제출하여 군대 파견은 동의하는데, 군 지휘권은 왕이 아닌 의회에 있다고 주장하여 왕의 분노를 샀다. 그런데 대항의서가 찬성 159표, 반대 148표로 가결되었다.

찰스 I세는 149표에 희망을 갖고 반격을 개시했다. 왕은 급히 자기를 지지하는 북부 요크 지역으로 도피했다. 1642년 8월 왕당파(Cavaliers, 기사당)와 의회파(Roundheads, 원두당) 사이에 1차 내전이 시작되었다. 에지힐 전투(Battle of Edgehill)를 시작으로 내전이 발생하고 말았다. 2년 동안 왕당파는 공격을 감행했다. 초기에는 왕당파가 우세한 힘을 보였다. 왕당파는 정규군들이었고 의회파는 시민군들이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는 의회파는 귀족, 젠틀맨의 일부와 자유농민 ·상공업자들이었고, 왕당파는 귀족, 젠틀맨의 대부분과 소작농이었다(젠트리,Gentry는 귀족은 아니지만 가문 휘장을 사용할 수 있고, 토지나 자본을 소유한 상인, 지주, 법률가 등의 중산 계급이었다). 의회파는 당시 발흥하는 모직물에 종사하는 신흥 젠틀맨들이었다. 잉글랜드 의회에는 의회파가 다수였지만 군대는 없었다. 왕당파에 대항하기 위해서 시민군으로 급조했다.

1643년 왕당파 군대는 런던을 향해 진공 추진했다. 런던 봉쇄를 목표했는데 내부 분열(수도인 런던 침공에 대한 거부)과 지엽적인 패배 증가로 제동이 걸렸다. 1643년 후반기부터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의 신형군(New Model Army)이 위력을 발휘하면서 왕당파 군대는 퇴각해야 했다. 그러나 전황(戰況)은 어느 쪽의 우위를 결정할 수 없었다. 그런데 찰스 I세가 아일랜드와 협정을 맺으면서 잉글랜드에서 민심이 완전히 이반되었고, 잉글랜드에서 스코틀랜드와 협약을 체결하게 된다.

1643년 잉글랜드 의회파는 스코틀랜드 언약도와 “엄숙 동맹과 언약(The Solemn League and Covenant, 1643년)”을 체결했다. 스코틀랜드의 관심은 스코틀랜드에서 주교 제도를 완전히 철폐시키는 것이었고, 잉글랜드는 왕당파를 척결해서 종교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었다. 두 집단(스코틀랜드 언약도와 잉글랜드 청교도파)이 한 목표 “예수 그리스도 나라의 확장”으로 동맹과 언약을 체결했지만 함께 완수하지 못할 협약이었다(同床異夢). 그러나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한 국가(United)가 되는 것(1707년)에 가깝게 되어가는 현상이 전개되었다.

1645년 왕당파와 의회파는 브리튼 섬 중부 네이즈비(Naseby)에서 격돌했다. 왕당파는 괴멸했다. 의회파 병사들은 청교도들이었는데, 왕당파 비전투원을 가혹하게 공격했다는 평가가 있다. 1645년 7월 랭포트 전투에서도 의회파가 승리를 거두었다. 찰스 1세는 생존한 왕당파 잔여 병력을 모아 전투를 결행했지만 패배했다. 1645년 11월 찰스 1세가 궁정과 사령부가 있는 옥스퍼드로 귀환했는데, 크롬웰의 군대가 1646년 봄 옥스퍼드를 포위 공격했다. 찰스 1세는 4월말쯤 변장하고 2명의 수행인과 옥스퍼드를 빠져나와 5월 5일 스코틀랜드 군대에 투항했다.

1647년 크롬웰에게 지병이 발생했다. 의회는 감독제도에서 장로교 체계로 전환시키고 찰스 I세를 복귀하자고 요구했다. 크롬웰과 독립파들은 반대했다. 스코틀랜드의 장로 제도를 위계제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의회는 급여 문제 등으로 군대를 해산시켰다. 군대는 해산하지 않고 의회에 압력을 가했다. 그런데 군대 내부에 수평파(Levellers, 분배파, Diggers)와 독립파가 충돌했다.

1648년 2월 찰스 I세는 잉글랜드 장로파 등과 밀약을 맺고 스코틀랜드 군대와 함께 잉글랜드로 진격했다. 왕당파는 포로인 수평파 지도자 존 릴번(John Lilburne)을 석방시키며 분열을 획책했지만 실패했다. 전쟁에도 패배한 찰스 1세는 크롬웰의 포로가 되었다. 왕당파와 장로파는 왕의 석방을 요구했는데, 1648년 12월 크롬웰은 프라이드 대령으로 의회에서 장로파를 색출해서 추방시켰다.

찰스 1세는 1649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에 의해서 처형되었다. 1651년 그의 아들 찰스 2세는 스코틀랜드에서 왕으로 추대되었다. 찰스 2세는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지역에 둥지를 잡으려고 했지만 카비스데일 전투에서 패배하고 주동했던 몬드로즈 후작은 처형되었고, 찰스 2세는 1638년 국민 언약과 1643년 엄숙 둥맹과 언약에 서명하면서 1650년 스코틀랜드에 들어왔다.

결국 스코틀랜드 의회는 양분되었다. 엄숙 동맹과 언약을 유지하자는 항의자(Protestors)와 크롬웰의 군대를 무산시키려는 결의자들(Resolutioners)로 분열하고 말았다. 총회는 1651년 결의자가 다수가 되었다. 찰스 2세는 스코틀랜드 군대와 잉글랜드 잔유 왕당파와 결속하려고 했지만, 잉글랜드 왕당파는 소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1651년 찰스 2세는 우스터 전투에서 크롬웰에게 격퇴되어 프랑스,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스코틀랜드 의회도 저항을 포기하고 잉글랜드 의회에 30석을 보장받고 자치권을 포기해야 했다. 애드윈 니스벳 무어는 이 현상을 영적 패배로 평가했다(무어: 2018, 102). 스코틀랜드 언약도들은 크롬웰 통치에서 총회가 해산되었지만 집회의 자유는 허락받았다.

크롬웰은 1649년 아일랜드를 잔혹하게 정벌하고, 1653년 스코틀랜드까지 복속시켰다. 그리고 영국의 유일한 성문법인 통치장전(Instrument of Government)을 제정해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호국경(護國卿, Lord Protector. 정식명칭, Lord Protector of the Commonwealth of England, Scotland and Ireland) 자리에 올랐다. 크롬웰의 무시무시한 독재정치로 청교도 시대가 도래할 것처럼 생각되었지만, 내부 분열(수평파), 민심이반, 후계자 지도력 결핍 등으로 결국 좌초되고 말았다. 1660년 찰스 2세(Charles II, 1630-1685)의 왕정복고되면서 즉각 국교회, 주교제도가 부활되었다. 1688년 명예혁명까지 국교회를 거부하는 스코틀랜드 언약도는 심각한 박해를 피할 수 없었다. 명예혁명 후 1690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1653년 이후 폐지에서 재건되었다.

<참고도서, 자료와 부기(附記)>

오덕교, 『언덕위의 도시 - 청교도의 사회 개혁적 이상』(수원: 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 2004).

임영태, 『돋보기 근현대사 4, 영국혁명』(서울: 21세기 북스, 2014).

이동희, 『꺼지지 않는 불, 종교개혁가들』(서울:넥서스크로스, 2015).

에드윈 니스벳 무어, 『언약도의 역사와 유산』, 오수영 역(서울:CLC, 2018).

W.L. athieson, Politics and Religion. Study in Scottish History from the Reformation to the Revolution, 2. vol(Glasgow, 1902).

김중락, “1641년 잉글랜드의 분열과 스코틀랜드”, 대구사학 55집,

이상규, “17세기 스코트랜드의 언약파 운동(I)- 언약파 운동의 기원과 역사”, 교회문제연구 1집(부산: 고신대학 교회문제 연구소, 1979)

정지준, “영국혁명기 수평파의 민주주의론”, 전남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97년.

김소영, “영국 시민혁명기의 수평파에 관한 일고찰”, 전주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95년.

성명숙, “청교도혁명기 수평파의 인민협력에 관한 연구”, 동아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93년.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쫓아낸 ‘태양왕’의 최대 실수”, 「중앙일보」, 2018, 04, 16.

이동희, “왕의 목을 자르고 청교도 국가 세운 올리버 크롬웰(下)”, 「국민일보」, 2012, 05, 21,

[참고 1] 참고로 정성구 박사가 스코틀랜드 언약도의 신앙고백서 복사본을 소장하고 있다. 한국칼빈주의연구원 원장 정성구 박사는 1638년 1200여 명의 스코틀랜드 장로파들이 작성하고 대표자들이 서명한 ‘스코틀랜드 언약도의 신앙고백과 서명’(가로 70cm X 세로 90cm)을 공개했다.

[참고 2] 1776년 식민지 개척자들이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이주했는데 75%가 청교도였다. 미국 내 교파별 교인분포가 1776년 회중교회(20.4%), 장로교(19), 침례교(16.9), 감독교회(15.7), 감리교(2.5), 로마 가톨릭교(1.8)로 분포했다. 1776년 7월 4일 식민지 동부 지역 13주는 영국을 향해서 독립선언을 선포했다. 1850년에는 감리교(34.2), 침례교(20.5), 로마 가톨릭교(13.9), 장로교(11.6), 회중교회(4.0), 감독교회(3.5)의 순으로 나타났다(조병하).

1768년에 프린스턴 대학에 새 총장으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존 위더스푼(1723-1794)은 상식철학을 들여왔고, 1812년 설립된 장로교신학교의 제1대 신학자들 사이에서 한 세기 이상 영향을 끼쳤다.

조병하, “부흥운동은 미국 프로테스탄트를 지배하는 신앙의 힘”, 아이굿뉴스, 2014.01.29.

[참고 3] 수평파 운동(水平派, Leveller, 1649-1649)의 첫째는 급진적 청교도주의(Radical Puritanism)이다. 수평파는 재세례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수평파는 성도나 죄인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는 평등론을 채택했다. 재세례파와 연관된 급진적 청교도주의는 수평파, 디거파(경제적 평등주의), 퀘이커파(Quakerism)이 있다. 수평파 지도자였던 릴번(J. Lilburne)도 제세례파 신도였다. 1640년대 예정설을 신봉하는 분파주의자들이 있었는데, 5왕국파(Firth Monarchist), 대기파(Seekers), 머글튼파(Muggletoniansts)등이다. 이들은 신자와 불신자를 구분했는데, 수평파와 디거스는 그런 의식을 거부했다. 수평파는 성경을 평등의 교본으로 보고, 칼빈주이와 로마 교황주의를 배격했다. 둘째는 신고전적 자연법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자연이 모든 사람에게 도덕적 절대성이라는 기본지식이 있다고 믿었다. 신이 인간의 마음 속에 새겨 놓은 법이고, 이성에 의해서 만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수평파는 자연법과 신법을 불가분한 것으로 보았다. 수평파는 자연법, 신법, 이성은 같은 것으로 인식했다. 자연법은 리차드 후커(Richard Hooker, 1553-1600), 윌리암 에임즈(William Ames, 1576-1633), 사무엘 러더포드(Samuel Rutherford, 1600-1661), 헨리 파커(Henry Parker, 1604-1652) 등의 법학자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1647년 릴번(Lilburne)은 자연법을 이성과 같은 것으로 보았고, 천부인권과 평등을 주장했다(인민동의설, 인민주권설). 셋째는 영국사와 영국 법률에 관한 일련의 사상이다. 조상들이 잃어버린 자유 회복을 주장하는 것이었다(노르만과 앵글로색슨의 갈등).

수평파 운동은 크롬웰의 독립파에 의해서 좌절되었지만, 프랑스 혁명과 19세기 영국 챠티스트(Chartist)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의회파에 합류했던 수평파는 1647년 독립파와 대립하게 되었다. 1652년 릴번은 네덜란드로 추방되었는데, 1653년에 돌아와 체포되어 1657년 도버 성에 사망했다. 수평파 지도자는 존 릴번(John Lilburn 1614-1657), 리차드 오버튼(Richard Overtone 1631-1664), 월리암 월윈(William Walwyn 1600-1680) 등이었다. 

고경태 ktyhb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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